교운2장1절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하신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ㆍ창녕ㆍ남지에 이르러 천계산ㆍ안국산ㆍ여항산ㆍ삼족산ㆍ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ㆍ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교운2장2절
도주의 부친은 휘가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는 홍문관 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도다.
교운2장3절
아기가 자라니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을 남달리 하셨도다.
교운2장4절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교운2장5절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 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2장6절
도주께서는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상제의 삼계 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
교운2장7절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 제민(救世濟民)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
교운2장8절
그 후에 도주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교운2장9절
그리하여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倉基里)의 이 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三十여 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중에서 이 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교운2장10절
도주께서 무오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 길은 상제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라 하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