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운2장11절
이해 十월에 도주께서 권 태로(權泰魯)외 몇 사람을 이끄시고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시니라. 이때에 도주께서 「개벽 후 후천(後天) 五만 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라 하시고 이 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집을 구하여 가족들을 그곳에 이사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도다.
교운2장12절
이 정률이 집을 구하려고 황새마을에 이르러 마을 사람 권씨를 만나니 그가 「간밤에 꿈을 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이사 거주하기를 간청하는지라. 정률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안면도에 건너가 가족을 모셔오니 권씨는 모든 것에 불편 없게 지성껏 보살폈도다.
교운2장13절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
교운2장14절
선돌부인이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도주께 아뢰니라. 이때 도주께서는 도수에 따라 이 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도다. 이곳은 황새마을에 가까운 통사동(通士洞)이니라.
교운2장15절
도주께서 七월 보름에 이 우형(李佑衡)을 앞세우고 금산사에 다녀오시니라. 권 태로ㆍ이 상우ㆍ박 붕래(朴朋來)와 여러 무리들의 앞에서 「오늘이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고 분부하시니 그들이 모두 자기의 허물을 개과하기에 힘쓰니라.
교운2장16절
도주께서 기미년 九월에 들어서서 정읍 대흥리(井邑大興里) 차 경석(車京石)의 보천교 본부에 둔(遁)궤를 가져다 둔 것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재실로 옮기고자 하셨도다.
교운2장17절
조 용의(趙鏞懿)와 권 태로(權泰魯)ㆍ권 영문(權寧文)ㆍ이 정두(李正斗)ㆍ김 사일(金士一)ㆍ박 붕래외 두 명이 대흥리로 가니라. 이들이 보천교 본부에 당도하니 九월 四일 새벽 한 시경이 되니라. 본부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때인지라. 그들이 한 방에 들어가 병풍으로 가려 놓은 둔궤와 약장을 찾아가지고 나왔으나 약장만은 도중에 놓고 왔기에 옮겨지지 못하였도다.
교운2장18절
도주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상생 대도(解冤相生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 주셨도다.
교운2장19절
도주께서 이 상우를 데리고 부안 변산(扶安邊山) 굴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二百이 넘었도다.
교운2장20절
도주께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