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록1장11절
상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으실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
행록1장12절
상제께서 일곱 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운자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 이라고 지으셨도다.
행록1장13절
상제께서 글방에 다니실 때 훈장으로부터 들으신 것은 그 자리에서 깨우치시고 언제나 장원하셨도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도다. 훈장이 서동(書童)들의 부모에 미안함을 느껴 속으로 다음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시험을 뵈었으나 역시 상제께서 장원하셨던바 이것은 상제께서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그로 하여금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하도다.
행록1장14절
상제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 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 덕안이 곧 돌아와서 상제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상제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행록1장15절
상제께서는 어렸을 때 남달리 장난을 즐기셨도다. 강 연회(姜然會)와 강 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상제님과 힘자랑을 하였느니라. 상제께서는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데 중쇠를 이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더라.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한 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十여 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상제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아니하니라. 어느 날 여럿이 상제와 장난하는데 상제께서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를 돌리듯이 하시더라고 김 광문은 전하도다.
행록1장16절
상제께서 여러 글방으로 자주 드나드실 때 글씨의 청을 받으시면 반드시 글줄 끝마다 한두 자쯤 쓸 만한 빈 곳을 남기고 써 주셨도다.
행록1장17절
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五十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상제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상제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행록1장18절
상제께서 정해(丁亥)년 어느 날 외가에 행하셨도다. 어떤 술주정꾼이 까닭없이 상제께 욕설을 퍼붓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아니하시니 난데없이 큰 돌절구통이 떠 와서 그의 머리 위를 덮어씌우니 그는 절구통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상제께서 몸을 돌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도다.
행록1장19절
상제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를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도다.
행록1장20절
상제께서 갑오(甲午)년에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溝郡草處面內主洞)에 있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