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록3장31절
상제께서 어느 날 류 찬명(柳贊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에 세우고 각각 十만 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3장32절
상제의 부친께서 이해 七월 초에 동곡에 가서 상제를 찾으니라. 부친은 형렬의 안내로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 김 성화(金性化)의 집에 인도되었으나 며칠 전에 군항(群港)으로 떠나 상제께서 계시지 않았으므로 다시 뒤를 쫓아 군항에서 상제를 뵈옵게 되었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군항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오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튿날에 집으로 되돌아가고 상제께서는 군항에 월여를 머무시다가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3장33절
상제께서 병오(丙午)년 十월 어느 날 예수교당에 가셔서 모든 의식과 교의를 문견하시고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도다.
행록3장34절
상제께 김 형렬이 「많은 사람이 상제를 광인이라 하나이다」고 고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거짓으로 행세한 지난날에 세상 사람이 나를 신인이라 하더니 참으로 행하는 오늘날에는 도리어 광인이라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3장35절
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 「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행록3장36절
상제께서 이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시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 하시니 그는 말씀에 쫓아 술을 올렸도다.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나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르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요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행록3장37절
정읍(井邑) 사람 차 경석(車京石)이 정미년 五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때 상제께서도 김 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네시고 술을 드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지언정 어찌 살기를 띠리오」 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 경석은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날이 저물어 상제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쫓으니라. 닿은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아집이니라. 경석은 그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워하였도다.
행록3장38절
경석이 그 물방아집에서 열흘 동안 묵으면서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였으되 상제께서 응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노하시고 때로는 능욕하시기도 하고 구축도 하여 보셨느니라. 그래도 경석은 끝끝내 떠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서 「그럼 네가 나를 꼭 따르려거든 모든 일을 전폐하고 내가 하라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할지니 너의 집에 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六월 초하루에 다시 이곳으로 오라. 그러면 함께 가리라」고 이르시니 그는 곧 돌아가서 가사를 대략 정리하고 그 날짜에 용암리에 다시 와서 상제께 배알하고 정읍으로 가시기를 또 청하는도다. 상제께서 불응하시다가 사흘 후에 허락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이 잠기는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헤엄쳐서 겨우 발목이 닿는 물에 이르렀는데 이제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려 하는도다」고 하셨도다.
행록3장39절
훗날에 상제께서 경석을 보시고 「너는 강령을 받아야 하리라」 하시고 「원황정기 내합아신(元皇正氣來合我身)」의 글귀를 읽게 하신 후에 문을 조금 열으시니 경석이 그 글을 읽다가 갑자기 방성대곡하는지라. 상제께서 일각쯤 지나서 울음을 그치게 하셨도다.
행록3장40절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明月千江心共照 長風八隅氣同驅
라고 하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