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1장21절
상제께서 「내가 삼계 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선천의 모든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선경을 만들리라」고 종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도다. 그 때가 더딘 것에 종도들이 한탄하면서 하루 바삐 상제께서 개벽을 이룩하시기만 기다리는도다.
권지1장22절
상제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에 돌아와 계시던 어느 날 「풍ㆍ운ㆍ우ㆍ로ㆍ상ㆍ설 ㆍ뇌ㆍ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라」 말씀하시고 다시 「내가 오늘 밤에 이와 같이 행하리라」 이르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과연 눈이 내린 뒤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렸도다.
권지1장23절
상제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 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 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 죽어 있었도다.
권지1장24절
신 원일이 건재 약국을 차리고 약재를 사려고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김 보경의 집에 들러서 상제께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러 이야기 끝에 「길이 질어서 행로에 불편을 심하게 받았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웃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었는데 원일이 이튿날 아침 길에 나서니 길이 얼어붙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느니라.
권지1장25절
상제께서 농암에 계실 때에 황 응종과 신 경수가 와서 배알하고 「눈이 길에 가득히 쌓여 행인이 크게 곤란을 받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장근(壯根)으로 하여금 감주를 만들게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잡수시니라. 쌀쌀하던 날씨가 별안간 풀리면서 땅의 눈이 녹아서 걷기가 편하여졌도다.
권지1장26절
한겨울에 상제께서 불가지 김 성국의 집에 계셨도다. 김 덕찬과 김 성국은 꿩이 많이 날아와서 밭에 앉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
권지1장27절
상제께서 약방에 계시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말씀하시니라.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내 이제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고 담배를 물에 축여서 세 대를 연달아 피우시니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나서 상제께서 웃으며 담뱃대를 땅에 던지시니 그제야 멈췄던 해가 솟았도다.
권지1장28절
상제께서 갑진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 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상제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 도삼을 불러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吊無人)」이니라.
권지1장29절
처음부터 영학(永學)은 도술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상제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대학을 읽으라 하셨는데도 명을 어기고 술서를 공부하기에 시(詩)를 보내어 깨닫게 했으나 상제의 말씀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영학이 죽게 되었느니라. 상제께서 내림하셔서 영학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을 것이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하라」 하시니 영학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 엄지손가락을 떼시니 곧 사망하니라.
권지1장30절
갑진년에 김 덕찬이 모친상을 입고 장례를 지내려고 전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용두치(龍頭峙) 주막에서 상제를 배알하니 가라사대 「오늘 장사는 못 지내리니 파의하라」 하시니라. 덕찬이 이를 듣지 않고 돌아가서 장례를 그대로 행하여 지정한 땅을 파니 큰 의혈(蟻穴)이니라. 다시 다른 곳을 파니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라. 덕찬이 그제서야 상제의 가르치심의 어김을 뉘우치고 부득이 토롱(土壟)을 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