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2장11절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
공사2장12절
상제께서 용두치 주막에 계실 때 광찬에게 한방의서(漢方醫書)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사오게 하시고 「네가 병욱의 집에 가서 주묵(朱墨)으로 이 책 중에 있는 약명에 비점을 찍으라」 이르시니 광찬이 명대로 시행하여 올리니 상제께서 열람하시고 그 책을 불사르셨도다.
공사2장13절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 미수(許眉叟)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이천 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네가 김 광찬ㆍ신 원일과 함께 백지 일 방촌씩 오려서 시(侍) 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四百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三七편을 염송하라」 명하시니라. 형렬은 그 명을 좇았으되 신 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는 「정읍 이 도삼을 불러서 행하라」 분부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 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 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 한 마리를 사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공사2장14절
상제께서 十一월에 사기를 옮기는 공사를 보시고자 동곡에 돌아오셔서 전일에 주었던 양을 잡게 하고 그 양 피를 손가락 끝에 묻혀 일만 이천 시(侍)란 글자에 바르시니 양 피가 다한지라. 상제께서 「사기(沙器)를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때 김제 수각(水閣) 임 상옥(林相玉)이 왔기에 상제께서 청수를 담던 사기그릇을 개장국에 씻어 그에게 주시니라. 그는 영문을 모르고 주시는 대로 그 그릇을 받았도다. 그는 며칠 후에 그 사기그릇의 용처를 여쭈었더니 「인부를 많이 모아 일할 때 쓰라」 하셨도다.
공사2장15절
상제께서 十一월에 동곡에 머무시면서 금강산 공사를 보시고 형렬에게 「내가 삭발하리니 너도 나를 따라 삭발하라」고 분부하시니 형렬이 속으로 달갑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나 부득이 응낙하니라. 또 갑칠을 불러 「내가 삭발하리니 내일 대원사에 가서 중 금곡을 불러오라」 하시므로 형렬은 크게 근심하였으되 이튿날 다시 그것에 대한 말씀이 없었도다.
공사2장16절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시려고 종도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셨도다. 종도들이 수련을 끝내고 각각 자리를 정하니 상제께서 종이쪽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시니 종도들이 마음에 있는 대로 점을 찍어 올리니라. 「응종은 두 점, 경수는 세 점, 내성은 여덟 점, 경석은 열두 점, 공신은 한 점을 찍었는데 아홉 점이 없으니 자고로 일남 구녀란 말은 알 수 없도다」고 말씀하시고 내성에게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물으시고 응종과 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되물으니 「그럴듯하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둘씩이나 원하느뇨」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니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럴듯하도다」고 말씀을 건네시고 공신을 돌아보시며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 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공신이 말씀대로 봉행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이 음양도수를 끝내시고 공신에게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공사2장17절
종도들의 음양 도수를 끝내신 상제께서 이번에는 후천 五만 년 첫 공사를 행하시려고 어느 날 박 공우에게 「깊이 생각하여 중대한 것을 들어 말하라」 하시니라. 공우가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아뢰기를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고 이르시고 「이 결정의 공사가 五만 년을 가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2장18절
十二월 초하룻날 고부인은 상제의 분부대로 대흥리에서 백미 한 섬을 방에 두고 백지로 만든 고깔 二十여 개를 쌀 위에 놓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니라. 이때 상제께서 「불과 물만 가지면 비록 석산바위 위에 있을지라도 먹고 사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 백미로 밥을 지어 이날 모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도다.
공사2장19절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ㆍ광찬ㆍ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 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 공신ㆍ황 응종ㆍ신 경수 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 주시고 또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十二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
공사2장20절
상제께서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거주성명 서신사명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居住姓名西神司命 左相右相八判十二伯 縣監縣令皇極後妃所)」라 써서 광찬에게 「약방의 문지방에 맞추어 보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일이 헛일이라」고 말씀하시기에 경학이 「여백을 오려 버리고 글자 쓴 곳만 대어보는 것이 옳겠나이다」고 말하기에 그대로 행하니 꼭 맞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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