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동학사
계룡산(鷄龍山)은 닭(鷄), 용(龍)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천황봉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진 모습이 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산의 이름이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과 계룡시, 대전광역시의 경계에 위치한 계룡산은 금남정맥의 끝자락에 솟아오른 명산이다.
동학사 쪽에서 올려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산 전체가 그윽한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특히 단풍이 물든 가을의 산과 눈덮인 겨울의 풍경이 장관이다. 계룡산은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묘향, 지리, 태백, 팔공산과 함께 5악 중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3악(묘향, 계룡, 지리산)중 중악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아왔다. 풍수 또한 뛰어나서 조선 태조가 도읍으로 삼기 위해 정상인 천황봉의 남쪽에 있는 신도안에 주춧돌까지 세웠을 정도이다.
풍수가 좋고 정기가 맑아서일까? 정감록이나 격암유록 등에 의하면 머지않아 이곳에 성인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열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계룡산은 각종 신흥종교와 무속신앙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계룡산 동쪽 골짜기에 싸여 있는 천년고찰 동학사(東鶴寺)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비구니 강원(講院: 승가대학)으로서, 이곳은 운문사 강원과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으로 손꼽힌다. 150여 명의 비구니들이 수행과 포교에 필요한 제반교육을 받으며 정진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 또한 동학사는 문필봉(文筆峰)이 있어서 학문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비구니들의 경 읽는 소리는 맑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하나로 어우러져 고즈넉한 산사에 그 청아함을 더해준다. 주변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교통이 편리해 계룡산의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에 이르는 약 3km 거리의 가로수는 벚나무로 이루어져 봄이면 벚꽃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원래 동학사의 유래는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로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였다.
920년(고려 태조 3년)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고려왕실의 원당(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빌던 법당, 또는 소원을 신명에게 빌기 위하여 세운 집)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고려 대승관 유차달(柳車達)이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넋을 기려 동학사(東鶴祠)를 건축하여 사찰이 확장되자 동학사(東鶴寺)로 절 이름을 바꿨다.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으며,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의 조종인 정몽주를 이 절에 제향했으므로 동학사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4년(태조 3년)에 고려의 길재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스님과 함께 단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 공민왕의 초혼제와 충신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457년(세조 3년)에 김시습이 조상치 · 이축 · 조려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그 뒤 만화 스님의 제자 경허(1849-1912)선사가 1871년(고종 8년)에 이곳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고,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원효가 신라불교의 새벽을 밝힌 법등이라면 경허선사는 근대 한국불교, 특히 선(禪)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선사였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현재의 전각으로는 대웅전 · 삼성각을 비롯하여 조사전 · 육화원 ·강설전 · 화경헌 · 범종각 · 염화실 · 실상선원 · 숙모전 등이 있다.
동학사에는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건축물이 있다. 동학사 경내에 들어서면 두 기둥이 우뚝한 홍살문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궁궐,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는 문으로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홍살문이다.
이것은 동학사가 사원이면서도 경내에 유신의 사당인 동계사, 그리고 삼은각과 숙모전이 있는 점들과 상호 연관된 인연들이 어우러져 세워진 것이다.
동계사(東雞祠)에는 신라 멸망 후 고려 개국공신 유차달이 936년(태조 19년)에 이곳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朴堤上)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초혼제를 지내면서 건립하였다. 그 후 1956년 다시 중건하여 류차달도 함께 추향(追享)하였다.
동계사 옆에는 고려의 충신이 모셔진 삼은각(三隱閣)이 있다. 삼은각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인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삼은각은 길재가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동학사에 와서 고려의 왕을 제사하고 절 옆에 단을 쌓아 포은 정몽주의 충혼을 불러 제사하고 위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399년에 유방택이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의 넋을 이곳에서 제사지냈다. 이듬해인 1400년에 공주 목사 이정간이 제단의 터에 각을 세웠으며, 길재 사후(死後) 후학들이 그마저 추가로 배향함으로써 삼은각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천문학자이자 고려의 유신으로 절의를 지켰던 유방택, 정몽주의 제자로 조선 건국 전에 정도전의 심복에게 피살된 이숭인, 조선 건국 이후 권근의 벼슬 권유를 거절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나계종의 위패를 추가하여 모두 6기가 삼은각에 모셔져 있다.
삼은각 서쪽으로는 단종이 모셔진 숙모전(肅慕殿)과 조선의 충신들이 모셔진 동묘, 서묘가 있다. 숙모전에는 세조에게 폐위당하여 죽은 단종과 정순황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남향인 숙모전 앞마당에 동묘와 서묘가 마치 왕 앞에 문무백관이 서열 한 것처럼 마주하고 있다. 숙모전은 1904년 고종 때 편액이 내려졌으며 그 이전에는 초혼각(招魂閣)이라 불렀다. 숙모(肅慕)란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란 뜻으로 단종 내외분을 숙모한다는 말이다. 건물의 이름을 ‘각(閣)’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집이란 뜻의 ‘전(殿)’을 붙인 것은 건물을 승격시킨 의미가 있다. 동묘와 서묘에는 세조에게 항거한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 숙모전은 매월당 김시습의 충절과 애통함이 깃들인 곳이다. 매월당은 당대 걸승으로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1455년(세조 1년) 거지꼴의 한 승려가 삼은각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 거지 승려 매월당은 단종이 숙부(세조)에게 왕위를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 여기에 그들의 혼백을 붙들고 통곡을 했던 것이다. 그는 1456년(세조 2년) 사육신이 참수를 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아와 삼은각 옆에 단을 쌓고 초혼제를 지냈으며 이듬해에 단종을 초혼하였다.
1457년(세조 3년) 9월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온양 온천으로 가던 차에 동학사에 들렀을 때 삼은각과 사육신 초혼단을 보고 김시습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8폭 비단으로 사육신과 그 부자 형제 및 연좌하여 죽은 자 등 총 100여 위를 열명(列名)하여 내렸다.
또 고려의 삼은 고사에 감격하여 고려 역대 왕의 성과 이름 및 고려 말에 죄 없이 죽은 자의 성명 100여 위를 열명(列名)하여 내리고 그들의 넋을 기렸다.
1458년에 세조는 친히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해 사육신과 세조 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관인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승려와 유생이 함께 해마다 10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883년(고종 20년)에는 초혼각 밖에 동묘 · 서묘 각 1칸씩을 별도로 세워 동묘에는 생육신이, 서묘에는 사육신이 모셔졌다. 현재는 동묘 47위, 서묘 48위가 봉안되어 있다. 동묘 건물의 좌측에는 김시습의 자화상이 걸려있으며 서묘 건물 내부의 우측에는 사육신의 친필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역대 충청도 관찰사가 숙모전, 동계사, 삼은각에 모신 충의지사를 관장했다. 1963년부터는 숙모회가 발족하여 봉안 대상과 의례 절차를 정비, 매년 춘향(春享: 봄 제사)과 동향(冬享: 겨울 제사) 두 차례 대제를 드린다. 그리고 1992년 숙모재(강의실)를 세우고 충절의 위대한 공적을 강의 선양하고 있다.
“병신년 三월에 박 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철규·박 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 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 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이렛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교운 제2장 57절)
도주님께서는 1956년 3월 동학사에 오셔서 경내에 있는 숙모전, 동묘, 서묘, 삼은각, 동계사를 두루 살피시고 염화실(拈花室)에서 7일간의 신명 해원 공부를 마치시고 한곳에 모여 있었던 수많은 동묘와 서묘의 신위를 바르게 배치해주셨다. 이곳에서 행하신 도주님의 신명 해원 공부는 초혼각지에 모셔져 있는 충의지사의 원을 풀어주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