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승달산(務安 僧達山)
전남 광주(光州)와 목포(木浦)사이에 있는 무안(務安)에 이르면 목포대학교(木浦大學校)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5km쯤 떨어진 곳에 승달산(僧達山: 318m)이 있다. 이 산은 목포에 있는 유달산(儒達山: 223m)과 쌍벽을 이루는 산으로 그렇게 크지도 높지도 않은 아담하고 청초(淸楚)한 산이다.1)
이 산에는 법천사(法泉寺), 목우암(牧牛庵) 그리고 총지사(摠持寺)등이 있다. 법천사는 725년(신라 성덕왕 24년)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스님이 창건하였다. 1030년(고려 현종 21년)에 불에 탄 뒤 100년 동안 폐사로 남아있던 것을 1131년(고려 인종 9년)에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에서 온 원명(圓明)스님이 중창하였다. 원명스님은 처음에는 초암(草庵)을 짓고 수행하였으나, 500여명의 제자가 몰려들자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도를 얻어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영축산에서 승달산(僧達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불상 등을 산내 암자인 목우암으로 옮겼다.
목우암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원명스님이 꿈에 백운산에 있는 총지사에서 소가 한 마리 나와 이 암자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스님이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암자에 가 보니 계곡 바위에 소 발자국 흔적이 있었다. 이 발자국을 따라와 절을 지어서 이름을 목우암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한편, 원명 스님이 이 암자를 풀을 사용하여 지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법천사에서 20여리를 송정마을 쪽으로 가면 총지사 절터가 있는데 신라(新羅)때 혜통(惠通)이란 스님이 당(唐)나라에 건너가 3년간 공부한 뒤 665년에 개산(開山)하였다 하며 총지종파(摠持宗派)로서 1424년에는 전남지방의 천태, 조계(天台, 曹溪)등과 합쳐 90여동에 달하는 거찰(巨刹)이었으나, 1810년경에 폐찰(廢刹)되어 절터만 남아 있고 500m거리에 석장승(石長僧) 2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四월 어느 날 김 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귀마다 「천곡(泉谷)」이라 쓰시기에 그 뜻을 치복이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옛날에 절사한 원의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치복과 송환으로 하여금 글을 쓴 종이를 마주 잡게 하고 「그 모양이 상여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갑칠은 상제의 말씀이 계셔서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서 서편 하늘에 한 점의 구름이 있는 것을 아뢰니 다시 명하시기에 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들어와서 한 점의 구름이 온 하늘을 덮은 것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 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2)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리니 六월 十五일 신농씨(神農氏)의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행하리라. 금년이 천지의 한문(捍門)이라.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니라」 하셨도다. (행록 제5장 15절)
상제님께서는 조화는 불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형(胡僧禮佛穴)을 쓴다고 하셨다. 호승예불형은 스님이 부처님께 목탁을 치며 예불하는 형상이다. 부처님, 절, 목탁과 같은 사격(砂格)3)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부처 형상의 산이나 바위 혹은 불암산(佛岩山)과 같은 지명이 있으면 되고, 절은 일자문성(一子文星)4)처럼 생긴 산이고, 목탁은 둥글게 생긴 산이다. 혈은 대개 목탁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성품이 고상하고 지혜로운 빼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다.
학문과 문장이 출중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며 도(道)를 닦아 선인의 경지에 오르는 대도인(大道人)을 배출한다.5)는 명당이다. 호승예불혈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 고승 도선(道詵)대사의 비결에 나타나며, 일지승(一指僧)같은 명사들이 남긴 비결록에 의하여 유명해졌다. 도선대사의 『옥룡자 유산록(玉龍子 遊山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사십사절(四十四節) 건해맥(乾亥脈)에 승달산(僧達山) 특립(特立)하니
금수병장(錦繡屛帳) 두른 곳에 우리 스승 계시도다.
당국(當局)이 평순(平順)하여 규모가 광대하고 제좌기상(帝坐氣象)은 높았고
산수(山水)가 회동(會同)하였구나.
천장지비(天藏地秘)한 혈(穴)을 저마다 구경하리.
만산(萬山)이 공조(拱朝)하고 백천(百川)이 폭주(輻輳)하니
갑산정기(甲山精氣) 모은 곳에 설법가사(說法袈娑) 벌였으니
아름다운 저 안산(案山)이 십이상좌(十二上佐) 분명하다
발우(鉢盂)는 동쪽에 있고 운암(雲岩)은 남쪽에 있도다.
저 노승(老僧)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百八念珠) 손에 들고
칠근가사(七斤袈裟) 떨쳐입고 모든 제자 강(講) 받으니
그 중의 한 노승(老僧)이 스승께 문안(問安)할 제
염주(念珠)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沖天)하니
혈(穴)은 방원개점처(在方圓蓋粘處)에 떨어졌구나.
사륜귀석(四輪鬼石)은 뒤에 있고 금어옥대(金魚玉帶)는 아래에 있고,
팔백연화(八百煙花) 놓여있고 삼천분대(三千粉袋) 모였도다
건곤간손(乾坤艮巽)이 특립(特立)하니 왕자사부(王子師傅) 흔히 나고,
병정손신(丙丁巽辛) 높았으니 장원급제(壯元及第) 대대로다
호로산(葫蘆山) 나타나니 여작왕비(女作王妃)할 것이요,
운증귀지(雲蒸貴趾)하였으니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이요,
토불토이작금(土不土而作金)하니 현목혹심(眩目惑心) 되리라. (중략)
성현(聖賢)은 여덟이요, 장상(將相)은 백대(百代)로다.
자손은 천억만세(千億萬世)에 장구(長久)하리라.6)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호승예불혈을 찾으려고 답사하였다. 승달산 곳곳에 있는 무덤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명당을 찾아 발복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풍수지리에는 ‘적선지가(積善之家)에 진비대혈(珍秘大穴)’이라는 말이 있다. 길(吉)한 산(山)을 얻고자 하면 선(善)한 것 밖에 없다고 하였다.7)0
하물며 상제님께서 공사에 쓰신 명당을 사람이 어찌 쓸 수가 있겠는가? 상제님은 무한무량한 덕을 갖고 계시기에 큰 명당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은 그만한 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고 하여 명당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순지침』에도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며, 재물은 말단이라 하는데, 근본의 덕을 외면하고 말단의 재물에 마음을 쏟으면 시비와 쟁탈만이 조장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도선 대사는 “어화 벗님이여, 나는 길지(吉地)를 아는 것도 없는 것도 쓸데없으니 오직 순천적덕(順天積德) 할 뿐이로다.”8)라고 하였다.
도선대사는 오직 하늘에 순응하고, 덕을 쌓을 뿐 이라고 강조한 것은 우리 수도인들에게도 전하는 바가 크다.
1)『대순회보 28호』「성지순례」: 천하 名穴, 聖德과 富의 길지 승달산에 무안 胡僧禮佛穴
2) 도선국사 원저․정관도 해설, 『도선국사 풍수문답』, 지선당(1994), p.307
3) 풍수학 용어. 혈의 전후좌우에 있는 모든 산과 바위
4) 풍수학 용어. 높고 낮은 봉우리가 없이 “一”자 모양으로 생긴 안산
5) 정경연, 『천기와 지기를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통풍수지리』, 평단문화사(2003), p.715~716
6) 도선국사 원저․정관도 해설, 『도선국사 풍수문답』, 지선당(1994), p.245~246
7) 도선국사 원저․정관도 해설, 같은책, p.121
8) 『대순지침』 p.76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