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井邑) 마동(馬洞)
(전북 정읍시 북면 화해리 347)
정읍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곳이며, 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신 곳이기도 하다. 전경의 두 구절을 살펴보고, 상제님 강세와 도주님 무극도 창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六대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탄강하셨으니, 상제의 성은 강(姜)씨이요, 존휘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니라. 때는 신미(辛未)년 九월 十九일인 즉 이조 고종(李朝高宗) 八년이며 단기로서는 四千二百四년이고 서기로는 一千八百七十一년 十一월 一일이로다.” (행록 제1장 5절)
“을축년에 구태인 도창현(舊泰仁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시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교운 제2장 32절)
『전경』 교운 제2장 13절을 살펴보면,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 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마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봉서(封書)를 받으시고 천부적인 종통계승을 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정읍(井邑) 마동(馬洞)은 지형이 달리는 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상제님 재세시에는 전라북도 고부군 우일면 마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마을과 병합하여 정읍군 우순면 화해리에 편입되었다. 1919년 도주님께서 마동에 가셨을 때에는 전라북도 정읍군 우수면 화해리 마동마을로 불렸다. 그리고 현재는 조동마을에 속해 있다.
2014년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서 원래는 화남길이었던 곳이 ‘화해성지길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원불교에서 화해성지라고 하여 ‘화해성지길’로 해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기부 집 터를 찾아가다보면 마을 입구에 화해성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해제우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해성지란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1891~1943)과 정산 송규(1900~1962)가 1918년 김해운의 집에서 처음 만난 것을 기리는 원불교의 성지이다.
김해운(金海運 1872~1939)은 김태형의 아내로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가족이 모두 상제님을 신앙하였고, 그녀가 가장 열심히 상제님을 따랐다. 옛날 시골에는 큰 아이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네 집이라고 불렀다. 김해운 가족이 사는 집은 장남의 이름을 따서 김기부(金基富 1896~19??) 집이라고 불렀다. 원불교의 성지인 김해운의 집과 도주님께서 봉서를 받으신 김기부 집은 같은 곳이라는 이야기다. 문득 ‘도주님께서 봉서를 받으신 곳이 왜 원불교의 성지가 되었을까?’ 라는 궁금함이 생긴다.
상제님의 유족(권씨대모, 정씨사모, 강순임)들은 객망리에서 살림을 나와 김기부의 집 아래 우물터 옆집 선돌부인 댁으로 합솔하였다. 그 집은 상제님께서 화천 하시기 전, 가을에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에게 사 주신 집이었다. 선돌부인은 고부 입석리의 박창국에게 출가하여 10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당했다. 이에 상제님께서 마동에 있는 김기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 주시며 살게 한 것이다. 1909년 1월 15일 상제님께서 그 집을 손수 수리하시고 도배까지 하시며 부인에게 “이 곳이 나의 본소니라. 너는 이곳에 살다가 10년 후 이 날 이 본소를 찾는 후천진인(後天眞人) 을미생(乙未生)에게 나의 도통을 전하라.” 하명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1919년 새해 명절치성을 마치고 도인들에게 상제님의 본소를 찾아야 한다고 하교하셨다. 그리고 1월 15일,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본소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돌부인이 김기부의 처를 보내 원평 황새마을에 계신 도주님을 찾아온다. 그 당시에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상제님 유족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1914년 봄에는 황모가 찾아와서 2년간 공부를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에는 송모가 와서 선돌부인의 지도 아래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3년이 되도록 성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도주님께서 마동에 오신 것이었다. 하지만 선돌부인이 3년간 돌보아준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상제님께서 계시로 시유기시(時有其時) 인유기인(人有其人)인데 그 사람은 진인(眞人)이 아니니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도주님을 맞으신 가족들은 상제님을 뵌 듯이 반가이 맞으셨다. 선돌부인이 본소의 내력과 송모, 황모에 대한 경위를 설명하셨다. 또한 현무경과 주문책 등은 모두 그들에게 주어서 돌려받을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라고 위로하셨다. 이때 문득 옛날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도 칠서(漆書)가 벽중에서 보존․ 전래된 고사가 생각나셔서 상제님께서 친히 도배하신 벽과 천정을 유심히 살피셨다. 도주님께서 앉으신 바로 뒷벽의 천정 아래에 시선이 닿으시자 영감 속에 한 곳이 섬광으로 번쩍이므로 그곳을 두드리시니 비어있는 소리가 났다.
선돌부인은 도주님께서 진법의 진주이심을 확신하였고, 여러 사람이 마당과 방구들까지 파 보았어도 찾지 못한 상제님께서 손수 쓴 글인 천서를 이렇게 전해 받으심으로써 상제님의 도통을 도주님께서 계승하심을 알게 되었다. 선돌부인이 천서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도주님께 드리니 이 날이 1월 15일 정월 보름이었다.
천서는 한지를 사방 9촌으로 접어서 철하고 상제님께서 친히 쓰신 책이다. 현무경은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附圖)가 기록되어 있고, 주문은 표지에 주문이라 쓰여 있고 7장 13면에 11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도주님께서 천서를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왜 봉서를 마동에 숨기셨을까? 도주님께서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받으실 때, 소태산 박중빈의 제자인 송규가 먼저 와 있었다고 한다. 송규가 종통의 봉서를 받으려 하였으나 주인이 아니므로 받지 못했다. 송규는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개안을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또한 도주님과 똑같이 정산(鼎山)이라는 호를 썼다. 하지만 그는 봉서의 주인이 아니었다. 마동(馬洞)의 마(馬)는 조씨(趙氏)를 뜻한다고 한다. 상제님께서는 도주님께서 조씨(趙氏)이기 때문에 조씨(趙氏)를 상징하는 말(馬), 즉 마동(馬洞)에 봉서를 숨기신 것이 아닐까 한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상제님께서는 여러 암시적 표현으로써 도주님을 나타내셨다.
계묘년(1903년)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 하고 한숨을 지으시니,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보경이 “무엇이 그렇게 더딥니까” 하고 여쭈었고, 상제님께서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 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 라고 하셨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p.103 참조> 이때 진인은 1895년 을미생으로 오신 도주님을 가리킨다.
또 도주님 일가족이 망명길에 오르던 기유년(1909년) 4월 28일, 상제님께서는 김보경을 비롯한 몇 종도들을 앞세우고 들판에 나가서 도주님께서 타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라고 하셨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p.265 참조> 이때 도주님의 나이가 15세였다.
우리는 마동에서 도주님의 종통 계승이 천부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순지침에는 “본도의 연원(淵源)은 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이 연원은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으므로 연운과 혼돈해서는 아니된다.” 라고 하였다.<『대순지침』 p.14>
이것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진인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암시와 계시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도통을 위한 수도는 삼망(三忘) 즉, 망기친 · 망기가 · 망기신(忘其親 忘其家 忘其身)하여야 하며 이에 더해 망망(忘忘)까지 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인지를 잊어야 하며, 가족인지 아닌지 또는 같은 소속인지 아닌지를 잊어야 하며, 부유한 사람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귀한 사람인지 천한 사람인지를 잊어야 하고, 잊은 것도 또 잊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남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 수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