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井邑)

    

     

정읍은 전라북도 서남부에 위치하여 전주와 광주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호남 서해안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총 면적 692.7㎢로 약 11만 5천명이 살고 있다. 정읍은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내장산 단풍은 호남의 단풍 중 가장 으뜸으로 쳐서, 가을단풍은 내장이라고 불려왔다. 또한, ‘산은 내장이요, 절은 백양이라’ 칭할 정도로 예부터 전국8경으로 손꼽히는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가 내장산에 자리잡고 있다.

백양사(白羊寺)의 유래는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백양사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들 속에 흰 양이 내려와 스님의 강론을 듣고 꿈에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고, 그 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내장산 백양사는 우리 대순진리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장산(內藏山)은 안에 무언가가 감추어진 산이라는 뜻이며, 백양사(白羊寺)의 흰 백(白)은 인산(人山)이고 신선 선(仙)이며, 양(羊)은 신미생(辛未生) 을미생(乙未生)으로 오신 증산(甑山) ․ 정산(鼎山)의 양위상제님을 뜻한다.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眞理)를 밝혀 주신 것이다.“ (대순지침 p.14)라고 하셨듯이 백양사 설화는 우리 도인들에게 감추어진 양위상제님의 연원을 깨닫게 한다.

“상제께서 어느 날 내장산(內藏山)에 가셨을 때에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세계유이차산출 기운금천장물화)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응수조종태호복 도인하사다불가)라고 읊으셨도다.” (행록 제2장 5절)

(세상은 모두 이 산으로부터 출현하였고, 후천 금세상 기운은 내장산에 감춰져 있고, 응당히 인류의 조상은 태호 복희씨인데, 어찌하여 도 닦는 사람들이 찬불가(讚佛歌)만 부르는가!)

 

둘째, 한글로 기록된 고가(故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인 ‘정읍사(井邑詞)’가 있다. 정읍사는 한 행상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높은 산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밤길에 오는 남편이 혹시라도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남편을 기다리던 행상의 아내는 기다리고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셋째,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중항쟁인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비록 동학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안으로는 갑오경장을 일으켰고, 밖으로는 청일전쟁을 일어나게 하였다. 또한 상제님께서도 “전 명숙은 만고 명장이라.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도다.”라고 칭찬하시며, 전명숙을 조선명부로 삼으셨다. (공사 제1장 34절, 공사 제1장 7절 참조)

 

이런 특징을 지닌 정읍은 마한시대에는 샘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샘마을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샘마을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정촌(井村)이라 했고, 이 이름이 백제 때까지 사용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景德王) 16년 (757년) 정읍(井邑)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읍은 상제님이 강세하신 곳이다. 상제님 강세 당시에는 고부군이었으나, 현재는 정읍시로 바뀌었다. 고부군(18개면)은 1914년 행정개편으로 백산면 ․ 거가면 ․ 덕림면은 부안군에, 나머지 지역(15개면)은 정읍군에 편입되었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마을은 당시에는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였고, 지금은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행록 제1장 6절 참조)

 

또한 정읍은 도주님께서 봉서(封書)를 받으신 곳이다. 상제님께서는 재세시에 봉서를 누이동생에게 맡기시며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10년 뒤인 기미년(1919년) 정월 보름에 도주님께서는 이치복 종도와 함께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現 정읍시 북면 화해리 조동마을 소재)을 찾으신다. 그곳에서 도주님은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받으시게 된다. 이 봉서는 상제님의 천부적인 종통을 도주님께서 계승하신 것을 상징한다. 이를 대순지침에서는 “본도의 연원(淵源)은 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내려왔다”(대순지침 p.14)고 하였다.

 

한편 “天下通情神 井邑運回(천하통정신 정읍운회)” (공사 제3장 39절) 라는 구절이다. 이는 천하의 통정신을 정읍에 운회케 하는 공사이다. 그렇다면 통정신(通情神)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통정(通情)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음’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 재실에 거주하는 박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권지 제1장 11절) 우리는 상제님의 말씀에서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되면 통정신(通情神)이 나오게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만나야 될 사람이란 누구일까?

상제님께서는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예시 87절)라고 하셨다. 또한, 계묘년(1903년) 상제님께서 한숨을 쉬시며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고 한숨을 지으시니, 김보경이 “무엇이 그렇게 더딥니까”하고 여쭈었고, 상제님께서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 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셨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p.103) 여기에서 진인은 1895년 을미생으로 오신 도주님을 가리킨다.

 

또 도주님 일가족이 망명길에 오르던 기유년(1909년) 4월 28일 상제님께서는 김보경을 비롯한 몇 종도들을 앞세우고 들판에 나가셔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라고 하셨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p.265) 이때 도주님의 나이가 15세 였다. 그렇다면 상제님이 만나야 될 사람은 진인(眞人)이신 도주님이 아니었을까?

도주님께서는 정읍에서 무극도를 창도하셨다. 을축년(1925년)에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 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시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다.(교운 제1장 32절)

무극도장은 1936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해 일본총독부에 몰수, 경매처분 되어 9년 후 완전 철거되었다. 무극도장 터는 (태인)미륵불교에서 사들여 1953년에 태인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인가된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1983년에 중등교육과정이 의무화되면서 폐교되었다. 지금은 그 빈 터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무극도장의 자취를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치마바위를 통해서 그 흔적을 엿 볼 수가 있다.

 

또한 정읍은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에서 포정소 ․ 포덕소 공사를 보신 곳이다. 상제님께서 11월 28일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이르셔서 포정소(布政所)를 정하고 공사를 행하셨다. (교운 제1장 27절) 또한, 차경석의 집에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도 보셨다. (교운 제1장 54절) 포정소는 국가의 정책을 펴는 곳이고, 포덕소는 상제님의 덕을 펴는 곳이다. 포정소와 포덕소는 유사성을 보이나 어떤 공사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차경석의 보천교가 정읍 대흥리에서 시작되어 600만 신도의 위세를 자랑했던 것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차경석의 죽음과 함께 보천교의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고, 보천교 건물은 일본에 의해 헐려진다. 차경석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선천의 기운을 주로 썼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십일전은 그 크기가 경복궁 근정전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 십일전에서 차경석은 천자로 즉위하려고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만다.

선천은 임금이 웅장한 궁궐에서 기거하며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큰 부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던 세상이다. 하지만 후천은 자신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지 않는, 일체의 사사로움이 없는 상제님의 도(道)가 펼쳐지는 세상이다. 또한, 임금이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 부귀를 도모하는 일체의 사심이 없음으로 백성들도 자신의 이(利)를 도모하지 않아, 세상에 죄악이 없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자 하지 않으니 음양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세상이다.

도의 진리가 현실에서 실현이 되었던 요임금 시절, 임금이 머물던 궁궐이라는 곳이 백성들 집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신하들의 집보다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하는 수도인으로서 한번쯤 생각을 해볼 부분이다. 도주님의 무극도와 차경석의 보천교는 같이 정읍에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걸지망(桀之亡) 탕지흥(湯之興) 두 문장으로 표현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걸(桀)의 악(惡)과 탕(湯)의 선(善)을 말씀 하심은 선천의 상극운과 후천의 상생운으로 비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도인들은 상하를 차별하고 경쟁하는 선천 상극의 기운을 버리고, 서로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는 후천 상생의 기운으로 수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