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남산 송광사(終南山 松廣寺)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송광사)

 

사찰 이름을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 부르는 이유는 도의(道義) 선사가 절터를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영천수(靈泉水)를 발견하고 큰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종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송광사는 통일신라 867년(경문왕 7년)에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지었다. 당시 이름은 규모가 큰 백련사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22년(광해군 14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년)까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완주 종남산 송광사는 늘 ‘완주 송광사’, 혹은 ‘종남산 송광사’라고 표기를 하지 않으면, 삼보사찰 중의 한 곳인 승보사찰(僧寶寺刹) ‘순천 송광사’를 떠올리게 된다. 종남산 역시 도주님께서 둔도수, 폐백도수를 보신 밀양 종남산과는 다른 곳이다.  

송광사는 고창 선운사의 도솔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심원사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개심사와 더불어 전국 4대 지장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절의 규모에 비해 큰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그 조형미로도 유명하다.

송광사 대웅전 삼존불(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은 크기가 무려 5.4m나 되는 웅장한 규모의 좌불로 국내 최대 규모이다. 삼존불은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을 부처님 가피로 극복하려는 염원을 담아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대왕 호국원찰(護國願刹)이다. 즉, 아비의 애틋한 잔정과 호국위민을 기원하는 국왕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는 불상인 셈이다. 대웅전 삼존불은 그 규모의 웅장함뿐만 아니라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며칠 동안 땀을 흘려 뭇 사람들에게 환난을 예고해 준다는 영험한 부처로도 유명하다.

송광사는 석가화현(釋迦化現)이라 불리우는 진묵대사가 오래 거처하면서 많은 이적을 보인 곳이다. 국내유일의 아자형(亞字形)인 종각(보물 1244호)이 있는 신라천년의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송광사와 관련된 구절을 『전경』에서 살펴보면 “상제께서 송광사에 계실 때 중들이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하시고 법당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 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태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 도다.”라는(행록 제1장 19절) 구절이 있다. 

지금도 송광사 대웅전의 기둥을 보면, 밀려나온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의 정문 바로 오른쪽 기둥은 특히 눈에 뜨일 만큼 앞쪽으로 나와 있는데, 주춧돌에 놓여진 기둥이 주춧돌 밖으로 나와 있을 정도이다. 또한 잡아당겨진 기둥을 안쪽으로 집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쇠밧줄 자국)이 기둥 아래쪽에 남아 있으며, 수리 중에 들보가 밀려들어가 옆의 들보와 어긋나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구천상제님께서 천년고찰의 법당기둥을 잡아당기신 것은 단순히 요망한 무리들을 꾸짖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불기(佛氣)를 뽑으신 상제님의 공사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도주님께서는 1923년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하시고, 전교를 내리신 바 있다(교운 제2장 26절 참조). 여기서 석가여래는 거금(距今) 2950년전 계축생(癸丑生) 소띠라는 것까지 밝혀주셨다. 전교가 내려진 해가 1923년이고 지금이 2015년이니 올해로 92년이 지났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불기(佛紀)는 올해로 3042년(2950+92=3042)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불기가 올해로 2559년이다. 이는 불교계에서는 남방불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생긴다. 

남방불기는 1956년에 11월 15일 네팔에서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WFB: 1950년 5월 25일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창립된 세계 최대의 불교단체)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각국의 불교대표들은 각국의 통일된 불기 사용을 위해 남방불기를 사용하기로 의결한 것에 기인하여 우리나라는 1962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 6차 회의에 효봉, 동산, 청담스님 등을 파견시켜 처음 참가한 후 남방불기를 채택하여 지금까지 쓰고 있다. 각국의 불교대표들은 각 나라마다 달리 써 오던 불기 연대를 통일하자는 안건이 주 의제로 상정되었고 논의 끝에 보다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불기를 채택한 것이 지금 우리나라가 쓰고 있는 남방불기이다.(1966년 8월 11일, 조계종 임시 중앙종회에서 불기 연대통일에 관한 안건을 토의하여, 1967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불기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이 아니라 열반한 연대를 불기원년(佛紀元年)으로 계산하되, 서기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정하고 편의상 세계적으로 통일해서 표기하기로 한 결과 사용된 불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북방불기와는 무려 483년의 차이(우리나라가 483년이나 앞섬)가 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도까지 북방불기를 사용하였다. 그 예를 들어보자.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로 잘 알려진 강원도 양양시의 오봉산 낙산사(洛山寺)가 있는데 낙산사 입구 표지석주에 불기 2960년 계유년 경신년 6월 0일 립(佛紀 二九六O 癸酉年 日 立)이라고 북방불기로서 미륵부처님이 오신다는 불기 2960년, 즉 서기 1933년에 낙산사 입구 표지석주를 세웠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한 사찰로 유명한 강원도 고성군의 건봉사가 있는데  이 절의 범종각 앞의 석주에도 불기 2955년 무진년 여름(佛紀 二九五五 戊辰 夏) 즉 불기가 2955년, 즉 서기 1928년에 석주를 세웠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올해가 2015년이니 남방불기를 결정한 해(1956년)로부터 59년(2015-1956=59)이 경과했다. 이 주장을 근거로 한다면 남방불기는 올해로 2559년(2500+59=2559)이다. 역설적으로 공자가 기원전 551년에 탄생[경술생(庚戌生)]하여 공기(孔紀)가 올해로 2566년이 되기 때문에, 공자가 석가모니보다 먼저 탄생했다는 말도 안 되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실제로는 석가모니가 공자보다 476년 이전에 태어났다. 또 이는 하늘의 운로(運路)인 500년 주기로 성인이 나온다는 성인출현설과도 맞지 않는다. 

올해 2015년(乙未)을 기준으로 보면, 불기는 3042년이므로 42년, 공기는 2566년이므로 66년이므로 그 한도가 이미 지났다. 3,000년 석가의 운이 다하자 도전님께서 불기 3,000년인 서기1972년 임자(壬子)년에 대순진리회 본부현판식을 거행하셨다.

상제님께서 “불가지(佛可止)는 불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만인(可活萬人)이라고 일러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고(예시 54절) 말씀 하셨다. 이는 석가불의 기운이 그치는 곳에서 미륵불이 출현하여 그 곳에서 많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가지(佛可止), 즉 ‘석가불이 가히 그치게 되는 현상’을 구천상제님께서 다음과 같이 확정지으셨다. 

  “상제께서 이해 여름에 김 덕찬을 데리고 불가지(佛可止)에서 신령(神嶺)을 넘다가 고사리를 캐던 노구를 만났도다. 상제께서 그 여인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청하시니 그 여인이 없다고 하더니 재차 청하시니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양식을 받아 들고서 덕찬에게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고 이르셨도다.”(예시 56절) 

 불가지에서 석가불의 기운이 끝나고 미륵불의 운(運)이 오게 되면 더 이상 걸식하며 수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로서 천하창생을 구제하는[광제창생(匡濟蒼生)] 새로운 도(道)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불교의 기운을 걷은 송광사 뒷산은 이름이 종남산(終南山)인데, 종남(終南)은 역(易)으로 해석하면 선천의 여름시대(2·7 火)가 끝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제님께서는 선천 여름시대의 막바지에 화(火) 기운이 극에 달하여 ‘말법시대에 처한 석가불의 기운’을 그치게 하는 불가지 공사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에서 행하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