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대원사(大院寺)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길 243 대원사)

상제님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시고 도주님께서 백일도수 보신 곳 - 

 

 

전라북도의 대표적 명산으로 우주의 모태가 되는 모악산(母岳山· 801m)은 천년고도 전주의 남쪽에 우뚝 솟아있고, 행정구역으로는 전주시 중인동,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와 전라북도의 진산으로 시민들과 전북 도민들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아늑하고 편안함을 주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이상향의 산이다. 

모악산은 옛말로 ‘큰 뫼’ 라는 뜻을 지닌 ‘엄 뫼’라고 하였으나 한자를 사용하면서 모악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바위산답지 않게 후덕하고 편안한 육산으로 전주를 품에 안고 있고, ‘어미산’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기서 발원한 물줄기는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이어져 호남평야를 적시는 젖줄역할을 한다. 예로부터 모악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불리는 전북의 영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산사, 귀신사, 대원사 등의 고찰을 품고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 호남 들녘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평지 돌출형 산세로 인하여 기름진 남도평야를 조망하기가 좋고, 전라북도의 어느 곳에서나 두루 잘 보이는 산이다. 예부터 모악산은 천지의 영험한 정기가 뭉쳐 있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증산교를 비롯한 여러 신흥종교가 태동했고, 이산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불교의 미륵사상이 개화했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기(氣)가 센 산으로 알려져 있고 미륵불을 열망하는 민중의 소망은 지금도 그치질 않는다. 사철로 볼 때도 모악산은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는 8대 학산에 속하며 몽환적인 단풍을 자랑한다. 또한 봄경치의 그 절경도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모악춘경(母岳春景)이라 하여 호남사경(湖南四景) 가운데 제일로 꼽는다. 고은 시인이 썼다는 모악산 비에는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다.

   어머니시다.

   저 홀로 펼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을 어머니이다. 라고 읊고 있다

 

어머니 같은 산 그 모악산은 명당으로 풍광으로 이름난 미륵의 땅이기도 하다. 말세에 이르러 세상을 구한다는 미륵 신앙이 모악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준 땅, 도탄에 빠진 백성을 푸근하게 감싸 안았던 모악산이기도 했다.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 진묵, 동학혁명의 깃발을 높이 세웠던 녹두장군 전봉준 등이 어쩌면 그 시대의 원을 담은 각각의 미륵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구이 주차장을 출발하여 느긋하게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기슭 해발 420m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완만하고 평이한 길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모악을 찾는 이들이 많다. 벚꽃이 화창한 봄날엔 절간을 모두 열고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의 장을 열고 수만 명의 남녀노소가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진 모악산 대원사는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로  670년(신라 문무왕 10년) 일승(一乘)이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일승 등은 고구려 보장왕 때 백제에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뒤 보덕이 머물고 있는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大原寺)라 하였다. 한 때는 대원사(大圓寺)로 표기하였으나, 현재는 대원사(大院寺)라 칭한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06년(선조 39년) 진묵(震默) 일옥(一玉)이 중창하였고, 1886년(고종 23년)에는 건봉사(乾鳳寺) 승려 금곡(錦谷)이 중창하였다. 

대원사는 상제님께서 1901년[신축(辛丑)] 5월 중순부터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으로 하여금 방 한 칸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신 곳이다(행록 제2장 12절). 상제님께서 공부하신 내용은 교운 제2장 21절에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곳이니라. 아직 응기 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나오며 도주께서도 대원사에서 백일도수를 보셨다.

상제님께서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후천해원을 구하려는 것을 아시고 상제님께서 이를 응낙하시니 모였던 금수들이 믿고 물러갔다』(행록 제2장 15절). 이밖에도 상제님께서 인간의 존귀함과 더불어 다른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신 부분이 전경 여러 곳에 보인다.

경석이 벼논에 날아드는 새떼를 굳이 쫓을 때 상제님께서 『한 떼의 새가 배를 채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어찌 천하 사람의 배를 채워주기를 뜻하리오』라고 말씀 하신 것과 장성원의 아기가 병에 걸렸을 때 상제님께서 성원에게 말씀하시기를 『비별(飛鼈)이니 낮이면 나와 놀고 밤이면 들어와 자니라. 불가불 다른 곳으로 옮겨야 나을 것인바 산으로 옮기려하나 금수도 또한 생명이요. 바다로 옮기려 하나 어류도 또한 생명이니 부득이 전선으로 옮겨야 하리라 ·‥』라고 하신 점,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을 대원사에서의 금수 해원에 대한 상제님의 행적과 연관시켜 볼 때 창생에 대한 구제가 인간만이 아닌 금수들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와 관련된 내용도 전경에 나오는데 전생에 관한 것과 진묵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전생에 관한 부분은 상제님께서 대원사의 주지승 금곡이 저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할 때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 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90세가 넘어 입적하리라』고 하셨다. 

전생의 인연에 따라서 오게 되어 대원사의 중수를 맡게 된 주지승 금곡과 수명을 연장시키시는 상제님의 말씀은 새롭게 지어 만드는 운수(대원사 중수)와 그에 필요한 여건(수명의 연장)으로 개벽을 위한 공사와 상제님의 약속을 보여주신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원사에는 또한 석가여래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진묵성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초의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는 당시까지 전해지던 진묵스님의 이적(異蹟) 열여덟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신통술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스님의 방편이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진묵스님이 대원사에 머무를 때의 일화이다.

 

국수로 변한 바늘 

진묵대사가 사미승이던 어느 무렵에 창원의 마상포(馬上浦 )를 자주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한 처녀가 스님을 훔쳐보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키워왔으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홀로 내생을 기약하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이 처녀는 환생을 하여 기춘(奇春)이라는 이름의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전생의 원에 따라 대원사에서 진묵대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사는 기춘이라는 아이를 시동으로 삼았는데, 신심이 지극하고 하는 일마다 영특하여 애지중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대사가 기춘을 편애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대중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사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임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 날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사중에 알렸다. 공양시간이 되어 사찰의 대중들이 모여들었지만, 공양 간에는 국수를 삶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모든 대중들이 자리를 잡자 대사는 기춘에게 여러 개의 바늘을 주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도록 하였다. 발우속의 바늘을 쳐다보며 영문을 몰라 하는 대중들에게 대사는 한마디 던지며 젓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국수 공양들 하시지요.” 어느새 대사의 발우에는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해서 가득하였으나 다른 대중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대원사 위로 올라가면 수왕사(水王寺)가 나온다. 여기는 주지승인 벽암스님이 빚은 송화백일주와 암반에서 흐르는 석간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왕사 이름도 일명 ‘물왕이 절’로 불린다.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제1호인 벽암스님이 빚는 송화백일주는 400년 전 조선시대 진묵대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해발 600m 고지에 위치한 수왕사에서 참선을 하던 수도승들의 고산병과 영양의 불균형에서 오는 혈액순환 장애를 예방할 목적으로 곡차를 일주일에 한 두 모금 마시도록하기 위해 만든 데서 유래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진묵은 유ㆍ선(儒ㆍ仙)에도 능통하였고 석가모니불의 후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전경에 나오는 진묵의 이야기가 이를 대변한다.

이상을 간략히 요악해 보면 대원사는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상제님께서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셔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였고, 도주께서는 백일도수를 보신 곳이다. 또한 김봉곡과 척이 맺힌 후 동양의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화계발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었다가 상제님의 해원공사에 의해 불교의 종장으로 임명되어 고국의 선경건설에 역사하게 된 진묵이 있던 본거지이기도 한다. 기회가 되면 좋은날  방문하여 살펴보는 것도 수도의 성적지로서 의미 있다 하겠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