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중곡도장 본전(1969년), 우: 중곡도장 전경(1971년)>
중곡도장 본전(1969년)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신 후 종도들에게 서울로 보내 도장 부지를 찾도록 하셨다. 종도들이 원지동 청계산과 관악산 기슭과 아차산 부근을 둘러보고 지세를 말씀드렸으나 도전님께서는 모두 적합하지 못하다 하시고, 이듬해인 1969년 봄 수리사를 떠나 서울 구의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속 도장을 건립할 자리를 물색하였으나 쉽게 찾지를 못했다.
도전님께서는 하루는 종도들을 불러 중곡동으로 가보라고 지시하였다. 그 당시는 서울 시내에서 화양리까지만 도로가 나있었을뿐, 이곳은 과수원과 밭이 있는 농촌으로 아직 도시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안준순 교감과 서대원 선감 등이 중곡동 용마산(龍馬山) 일대를 살펴보고 있던 중 안준순이 산중턱 복바위 아래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의 주인을 모시고 오라” 하므로 그는 놀라 황급히 놀라 물러나와 도전님께 이 사실을 말씀 드리니, 도전님께서 종도들을 대동하고 용마산 복바위 아래에 이르셨다.
도전님께서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시고는 “이곳이 바로 천장길방(天藏吉方)한 자리로다.” 하시고 땅을 매입하게 하셨다. 천장길방이란 ‘하늘이 감추어놓은 좋은 길지(吉地)’를 말한다.
용마산 복바위 아래에는 예전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미륵불(彌勒佛)이 현신(現身)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이로써 북한산에서 수락산을 거쳐 용마산으로 산줄기가 뻗어내리고, 중랑천과 한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도장 터가 마련되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흘러오던 산맥이 금강산 북쪽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상류를 타고 광주산맥을 이루고, 이 산맥이 도봉산·북한산·인왕산의 양(陽) 기운을 이루었고, 또 한 줄기는 수락산·불암산·용마산의 음(陰) 기운을 이루고 있었다. 중곡동(中谷洞)은 ‘중앙 5·10 토(土)’이고 진술축미(辰戌丑未)의 운(運)이며, 또한 도장이 자리한 곳은 용마포태혈(龍馬胞胎穴)로서 선녀정좌형(仙女定座形)으로 불린다.
중곡(中谷)의 또 다른 의미로 ‘아기가 태어나는 곳’을 의미한다. 즉 용마산의 형태가 마치 선녀가 임신해 만삭의 몸으로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곳 중곡동이 자리한 지형(地形)과 그 지기(地氣)가 부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 도통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여기서 다시 용마 즉 진인이 나오셔야 우리 도가 완전하게 성취된다는 의미가 있다. 만삭이면 10개월이 다 되었으므로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태아와 어미까지 위험하게 되는데 아이가 나오게 되는 것은 어미나 태아의 의지가 아닌 양수에 의해 저절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은 내부에서 외부로 밀려 나오는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바라던 도장 자리를 매입하자, 1969년(己酉年) 4월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시고 종단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하셨으며, 이때부터 도장 건립공사를 시작하셨다. 도장 건립공사를 시작하자, 도전께서 태극도를 떠나온 이후 흩어졌던 수도인들이 모여들어 공사에 참여하였다. 건립공사 중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두 합심 단결하자 모든 공사가 순조로웠다. 그 해 6월 본전(本殿) 정초식을 하고 8월 24일에는 상량(上樑)을 하였으며, 1969년 12월 4일에 본전 3층을 준공하고 도주님의 탄강치성을 올렸다. 1971년 중곡도장이 완성되어 5월 24일에 봉안치성을 올렸다.
후일 도전님께서 “중곡동 도장은 그때 안 지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운(運)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도수라 하는 것이다. 중곡동은 무기·토(戊己·土)로서 진술축미(辰戌丑未)가 되고, 중앙 5·10 토(土)를 중곡(中谷)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도장이 건립된 중곡동(中谷洞)은 오행상으로 5·10 토(土) 중앙(中央)에 속하고, 진술축미의 운(運)을 가짐은 선천의 유·불·선(儒佛仙)의 기운을 통합하여 완성한다는 의미가 되며 또 그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후천 진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