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수

 

전경』에 상제님께서 동곡 마을에 사는 김사명의 아들이 급병으로 죽게 되어 제생(濟生)의 의법(醫法)을 베푸실 때 “미수를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는 구절이 있다.(제생 9절 참조) 여기에 상제님께서 송시열(우암)과 허목(미수)을 천지공사에 쓰신 깊은 이유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허미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니다.

 허목(許穆, 1595~1682)은 1595년(선조 28년) 서울 창선방(彰善坊, 현재 종로구)에서 아버지 허교(許喬)와 어머니 나주 임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문집인 『기언(記言)』 자서(自序)에 ‘文’ 자 무늬가 손바닥에 있으므로 자(字)를 문보(文甫), 화보(和甫)’라 했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 현재 서울시 강서구)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의 후예가 된다.
  아버지 허교는 경남ㆍ경북ㆍ경기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분으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인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花)의 제자이다. 허목은 어려서부터 7년 연상의 종형(從兄: 사촌형)인 허후(許厚)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23세에 아버지의 부임지인 경남 거창으로 갔다가, 사촌형 허후(許厚)와 함께 경북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긴다. 정구는 그 당시 영남 예학(禮學)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허미수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서인(西人)이던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그를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는 동방 제1로 칭해집니다.
 56세인 1650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승하하자 예론으로 우암 등과 대결하였다. 인조(仁祖)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조에게 독살되고, 둘째 아들인 효종(孝宗)이 왕통을 계승했다. 그 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씨가 효종을 위하여 몇 년 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기해예송(己亥禮頌 1669)이라고 한다. 기해복제(己亥服制)에 문제가 된 것은 효종이 가통(家統)으로 보면 차자(次子)가 되고 왕통(王統)으로 보면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복 입는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1년 복을 주장했고 윤휴와 허목은 3년 복을 주장하여 예송이 제기되었다. 허미수는 이 논쟁에서 패하여 삼척부사로 좌천된다.

 그가 삼척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 지방은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서 강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는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이치를 담아서 도가(道家)적이며 신비한 내용으로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척주는 삼척의 옛 이름이다.
 이 비는 전서체(篆書體)로 비각(碑刻)하여 1662년 정라진 만리도(汀羅津 萬里島)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비를 세운 이후 정말 바다가 잠잠해지고,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에 삼척 사람들은 '조수를 물리친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퇴조비(退潮碑)라 부르게 되었다.
 척주동해비는 효험이 있어서 비문만 소장해도 재액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비문의 탁본을 소장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래의 비석은 1708년 누군가에 의해 또는 후임부사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었다는 풍설(風說)과, 풍랑으로 바다에 빠졌다는 풍문(風聞)만이 전해 올 뿐이다. 훗날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미수의 문생(門生)인 한숙(韓塾)으로부터 소장본을 구하여 모사개각(模寫改刻)하였고, 1709년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록에 비각을 짓고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정라항을 굽어보고 멀리 동해를 조망하는 육향산(六香山)의 육향정 아래 동해비각(東海碑閣)에 안치(安置) 되어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미수선생이 비문을 세우면서 말하기를,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碑)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때는 이곳을 떠나야 산다고 하였다니, 허목도 지축변화의 앞일을 알았던 것일까?
  김 일부(1826-1898)가 정역(正易)에서 이미 예시하고 있듯이, 북 빙하가 완전히 풀려 무너질 때에 지구의 변화가 오고, 지구가 정면(360도)으로 바로 서면서 세계적인 지진과 해일의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열도에서의 잦은 지진해일도 이러한 변화의 징조로 볼 수 있다.
  미수 허목도 당대에 유명했던 북창, 수암, 남사고와 거의 동시대인임을 감안할 때 도학에 밝아 앞일을 예언하였기에 그리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朞年說: 1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남인이 집권하게 되고 허목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678년에 유배 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영의정 허적(許積)과 대립하며, 허목은 서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자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 청남(淸南)의 영수(領首)가 된다. 다음해 영의정 허적의 권력 남용과 탐학(貪虐)을 탄핵한 후 고향인 연천(漣川)으로 낙향하였고, 1680(숙종 6년)에 허적 등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는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관직을 삭출당하고, 1682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미수기언(眉叟記言)』,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합니다.
 1688년(숙종 14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1691년(숙종 17년) 경기도 연천군에 사당을 세워 ‘미강서원(嵋江書院)’이라는 사액(賜額: 임금이 사원ㆍ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리는 일)을 내리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1693년(숙종 19년), 나주에 사당을 세워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린다. 1708년(숙종 34년), 창원에 있는 스승 정구(鄭逑)를 모신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되었다.

 한편 허미수와 송우암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암이 중년에 병이 나서 미수에게 문약(問藥)한 일이 있었다. 아들을 시켜 미수를 찾아가서 자기 병세를 상세하게 고하고 약방문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우암도 약방문을 못 내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미수 외에는 자기 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미수가 우암에 대한 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비상 세푼을 정화수에 탕하여 춘부장께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우암의 아들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비상 세 푼이라니 먹고 죽으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아버지가 걱정되어 “더 좋은 약은 없을까요?”하니 그제서야 미수가 필묵을 꺼내더니 초제(草劑)로 약방문을 적어서 아무 말 없이 건네주었다. 아들은 인사를 올리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우암께 그 글을 올렸다.
 우암이 죽 훑어보고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아무 말 없으시더냐?”하셨다.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자세히 고했다. 그러자 우암이 “그러면 그렇지. 역시 미수다워”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약장에서 비상 세 푼을 내어 미수 어른께서 시키는 대로 다려 오라고 했다. 우암이 비상 세 푼의 약방문을 자기도 마음속에 내어놓고 혹시나 하여 미수선생님께 보냈던 것이라 한다. 이 얘기는 비록 정치상의 의견대립은 있을 수 있어도 인명에 관한 의술에는 의견을 달리할 수 없었고 인간적으로 약에 대하여 물을  만큼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허미수와 송우암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허미수는 ‘육경학’을 송우암은 ‘성리학’을 추구하는 학문관의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결국 정치사상적 차이로 인한 북벌론과 예송논쟁에서 첨예한 대립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대립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아닌 당파끼리의 대립이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등 3대에 걸쳐 정권을 서로 뺏고 빼앗기는 관계였었다. 결국 두 당파의 대립은 학자이며 정치가인 송우암이 천수(天壽)를 다 하지 못한 채 83세의 나이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숙종이 우암을 죽이는 결정을 내렸으나, 그 후면에는 허미수를 중심으로 한 남인(청남)이 있었다. 우암은 임금을 바꾸려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으나 역모죄에 해당하는 죄값을 치렀는데, 사약을 받을 당시 그의 죄목은 역모죄와는 전혀 다른 ‘죄인들의 수괴’라는 것이었다. 우암이 사약을 먹고 죽음으로써 서인이라는 당파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서인과 남인의 관계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상제님께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고자 하실 때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불러라.”고 하신 것은 미수와 우암 간의 맺혀 있던 벽을 허묾으로 해서, 조선 중기 이후 서인과 남인 간의 당쟁으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의 원을 푸는 공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도수로 인해 죽은 아이는 자연스럽게 살아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