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선(兵仙) 한신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천하를 놓고 다투다가 결국 한나라가 천하를 얻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400년 국가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초한지(楚漢誌)다. 이 초한지에서 전략의 기재이자 백전백승의 장군이며 병선(兵仙)이라고 불려진 한신이 등장한다. 한신은 소하(蕭何) · 장량(張良)과 함께 한(漢)나라의 개국 3대 공신중의 한사람 이였다.
하지만 한신은 살아서 평생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이란 욕을 먹었고, 역사에서도 개국공신이라는 미명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한나라 건국도, 장량의 책략도 무용지물이었으며 결코 항우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한신은 어려운 형편으로 자주 밥을 얻어먹곤 했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던 한신을 가엾게 여긴 한 여인이 밥을 나눠주었다. 며칠 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자 한신은 언젠가 꼭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감사인사를 전했으나, 여인은 그저 가엾게 여겨 나눠주었을 뿐이라며 화를 내고는 떠났다. 실제로 나중에 왕이 되어 천금으로 갚았다. 이것이 ‘밥 한 끼에 천금으로 갚는다’라는 일반천금(一飯千金)의 고사 유래이다.
그렇게 빈둥거리면서도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칼을 몸에 차고 다녔다. 하루는 시장에서 거들먹거리던 불량배들이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지나가는 한신을 불러 세웠다. 그리곤 “야, 허우대만 큰 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기가 두려우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며 길을 막고 버티고 서 있었다. 한신이 주변 패거리들을 보더니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서 목숨을 보전햐였다.[胯下之辱(과하지욕)]
진시황이 죽은 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한신은 고향을 떠나 항우(項羽)의 군대에 들어갔다. 한신은 항우의 시중꾼인 낭중(郎中)으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으나 항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용되지 못한 한신은 항우를 떠나 한으로 귀속했다.
여기서도 군량미를 관리하는 직책으로 아무도 그를 뛰어난 인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일로 인해서 소하와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소하는 몇 번 한신과 대화를 해보니 그 그릇이 보통이 아니어서 유방에게 천거를 하였다. 하지만 유방이 차일피일 미루며 한신을 중용하지 않았고, 결국 실망을 한 한신이 파촉(巴蜀)을 떠나자 소하가 부리나케 쫓아가 다시 데려왔다. 그제서야 유방은 한신을 다시 보게 되었고, 좋은 날을 택하여 제계하고 단장(壇場)을 설치하여 한신을 대장으로 임명했다. 한신의 지휘아래 정예군으로 다시 태어난 한나라 군대는 B.C 206년 8월 파촉을 출발하여 중원으로 나왔다.
탁월한 장량의 외교적 수완으로 많은 지역들이 한왕 유방에게 복속해온 것은 한나라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한나라는 압도적으로 강했던 초나라와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제후국들이 미래에 대한 예측불허로 한나라에 붙었다, 초나라에 붙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제후국들은 어느 편에 줄을 서야할지 몰랐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어느 편을 가담하느냐에 따라 초한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다른 제국들을 포섭하거나 복속시켜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한신은, 다시 배반한 위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온 뒤, 곧바로 대주(代州), 조(趙)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를 차례로 점령하기 위해 장도를 떠난다. 한신이 없는 유방은 항우와 대결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위기를 맞기도 하면서도 전선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한신은 마침내 마지막인 제나라마저 점령에 성공한다.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명망 있는 제후국이었다. 한신은 본인이 제나라를 점령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고 있을 무렵, 모사 괴철(蒯徹)은 한신의 마음을 읽고 유방에게 이야기하여 제왕의 자리에 대해서 확답 받아 놓으라고 한다.
본디 한신은 생각이 깊은 자였지만, 미천한 출신이었던 본인이 제나라의 왕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자 한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제나라를 수습하고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서는 왕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으니, 이번의 공로를 치하하시어 본인을 제왕으로 임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초나라의 지속적인 공세에 대응하고 있던 한왕은 한신의 서신을 받자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한은 초나라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고 고초를 겪고 있는 시기를 틈타, 본인의 잇속을 챙기려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장량과 소하도 해당 서신을 보고는 무척 놀랐지만, 한신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한신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신은 현재 제나라에 눌러앉아 움직이려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유방에게는 무언의 압박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지략가 장량은 한신을 오히려 삼제왕(三齊王)으로 봉하게 하고 빨리 한왕을 돕도록 출병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쪽전선에서 한왕 유방의 본군이, 동북에서 제왕 한신이, 남쪽에서 구강왕 영포가 이렇게 세 방향에서 항우를 공격하여 초를 멸하는 것이 유방측의 전략이었다.
항우가 초군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다고 여겨 보냈던 용저(龍且)가 한신에게 패하여 초군의 형세가 약해지고 유방 역시 광무산에서 항우와 대치하느라 힘이 빠져 한신은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때에 있었다. 이를 당하여 괴철이 한신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초왕도 한왕과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 두 왕의 운명은 대왕께 달려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漢)의 편을 들면 한이 이기고, 초(楚)를 편들면 초가 이깁니다. 대왕께서는 초와 한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마시고 그대로 양립시킨 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세 방면에서 할거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그러면 아무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와 한이 미치지 않는 후방을 제압하고 제후들을 복속시키면서 차츰 세력을 넓히시면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받는다[천여불취 반수기구, 天與不取反受其咎]는 말이 있으니 모쪼록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이에 대하여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왕의 나에 대한 신뢰가 극히 두텁소. 나를 자신의 수레에 타도록 하시고 자신의 옷을 입도록 하시고(脫衣衣之) 자신의 식사를 내가 먹도록 하시었소(推食食之).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의 근심을 대신 품고, 남의 식사를 먹는 자는 그를 위해 죽으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내 이익을 위해 어찌 의를 배반할 것이오?”
괴철은 다시 말한다. "한왕은 폐하의 환심을 사려고 부랴부랴 삼제왕에 봉하고 심지어 많은 영토까지 주었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오라 폐하의 힘을 빌려 항우를 정벌하기 위한 계략임을 아셔야 합니다. 유방이라는 인물은 항우가 제거되고 나면 그때에는 반드시 장군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재화를 당하지 마시고 영화를 누리시옵소서!"
한신이 차마 한을 배반하지 못하자 괴철은 부리나케 문을 박차고 나가 사라졌다. 자신이 모반죄로 체포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유방이 베푼 퇴사식지(推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신의 보은에 관련된 일화는 초나라에 와서는 밥을 얻어먹은 빨래하는 여자를 불러 천금을 주었고[일반천금(一飯千金)], 그리고 자기를 가랑이 밑으로 기어 모욕을 준 시장 불량배도 불러 경호원으로 중위로 삼고, 여러 장상들에게 말했다.
“이자는 장사다. 나를 욕보였을 당시에 내가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 죽여도 이름을 낼 수 없어 지금 성공하기까지 참은 것이다.”
한신은 B.C 220년에 해하(垓下)에서 난적인 초패왕 항우를 전멸시켰다.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었던 한신으로 인해 한나라는 4년간에 걸친 초·한전을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위대한 전략가이지만, 순수한 한신이었다. 전쟁의 신으로 여겨지는 인물, 모든 전장에서 백전백승을 거두고 6국을 정벌하던 대장군 한신. 그는 여기서 그만 괴철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취소시킨다. 한신은 그 한번의 오판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B.C 202년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고조가 되자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으로 강등시켰다. 한신이 초나라를 다스릴 때 유방의 원수인 초나라 장수 종리매(鐘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맡긴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유방이 종리매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한신은 종리매를 보내줄 것인가, 보호해줄 것인가 갈등에 놓인다. 이에 종리매는 화를 내며 한신을 꾸짖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만났으나 유방은 한신을 묶어 체포하였다. 유방은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후 한신의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였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자 그를 다시 석방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여 장안(長安)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한신은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유방을 원망하면서 불만에 찬 나날을 보냈다.
기원전 196년 한신은 조나라 승상으로 있던 진희(陳稀)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다. 사마천은 「회음후 열전」에서 진희와 함께 모반을 하려다 들켜 처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여후(呂后)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때 한신은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사람들의 말에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버리고. 날쌘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인다.[高鳥盡良弓蔣(고조진양궁장) 狡兎死走狗烹(교토사주구팽) ]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괴철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아녀자의 속임수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운명이란 말인가!"
『전경』에 “와해지여 한신병선 역무내하(瓦解之餘韓信兵仙亦無奈何) 병법의 신선이란 소리를 듣는 한신도 조직이 와해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공사 제3장 39절)라는 구절을 보듯이, 한신이 삼제왕에서 회음후로 격하되고 장수 부하 없이 조직이 와해되어 홀로 남게 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대장군으로서 누구보다 항우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한신이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작은 보상을 받았다. 한신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한번 지위에 오르고 나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법이다. 한신은 불만이 쌓이고, 한신의 존재는 유방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결국 한신은 유방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모반을 기도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한신은 모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이에 대한 논란은 학계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포박당하여 참수당할 때 “내 괴철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이에 아녀자의 속임수에 떨어졌으니 어찌 하늘이 시키는 일이 아니겠느냐?” 했던 말이 그의 의중을 짐작케 할뿐이다. 상제님께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신(韓信)은 한고조(漢高祖)의 퇴사 식지(推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니라.”(교법 제2장 49절)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