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栗谷 李珥)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經世家)이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號)는 율곡(栗谷) · 석담(石潭) · 우재(愚齋) 등이다. 율곡이란 호는 친가가 있던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수운판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 신사임당은 시, 서, 화의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현모였다. 사임당은 율곡을 낳을 때(1536년 12월) 검은 비늘의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불쑥 날아와 방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그래서 사임당은 율곡의 아명을 ‘현룡’으로 지었고,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 하였다. ‘이현룡’이 ‘이이’로 바뀐 것은 율곡의 나이 11살 때이다.

그 무렵 율곡의 아버지는 중병에 걸려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율곡은 조상을 모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 대신 자신이 죽도록 해달라고 비는 한편 자신의 팔뚝을 찔러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음하는 아버지 입 속에 흘려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이원수는 낮잠을 자다 꿈속에서 백발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이원수에게 “당신의 아이는 분명 나라의 큰 유학자가 될 것이요. 그러니 이름을 이(珥)로 바꾸시오”라고 말했다. 이원수가 “내 아들은 용을 보고 낳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현룡이라 했는데 이름을 바꾸라니요”라고 묻자 백발노인은 이렇게 답했다.”이(珥)란 귀걸이를 뜻하는데 매우 귀한 것을 말한다오. 그러므로 꼭 바꿔야 하오.” 이로 인해 율곡의 이름은 이현룡에서 이이로 바뀌게 됐다.

 

율곡은 7남매 중 다섯째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6살 때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의 아버지 본가로 올라와 10여년을 살다가 16살 되던 해 봄에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어릴 적부터 율곡은 외부로 나가 수학하기보다는 주로 사임당에게서 사서(四書)를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다.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라고 묻자 어린 율곡은 잠시 쳐다보더니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라는 옛 싯귀를 읊어 대답했다고 한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3살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살 때는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가을의 정취를 시로 읊었다.[화석정시(花石亭詩)] 10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는데 여기서는 노장사상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닦은 율곡은 13살 때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21살 때는 한성시에 급제했으며, 23살에는 별시해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는 등 관직에 나가기까지 무려 9번이나 장원급제해 ‘구도장원(九度壯元)’으로 불렸다.

 

1551년 16살 때 사임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실의에 빠진다. 탈상을 하고도 밤낮으로 흐느껴 울던 율곡은 19살 때인 1554년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1년 간 용맹정진(勇猛精進)한다.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하였고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다.

 

계분수사파(溪分洙泗) 시내는 수사(洙泗) 물결처럼 갈리어지고

봉수무이산(峯秀武夷山) 봉우리는 (주자의) 무이산 같이 빼어나도다.

활계경천권(活計經千卷) 살아가는 일은 경전 천 여 권

행장옥수간(行屋數間) 나고 듦은 두어 칸 집 뿐이로다.

금회개제월(襟懷開霽月) 흉금의 회포가 열리니 마치 구름 걷힌 달과 같고

담소지광란(談笑止狂瀾) 담소는 어지러운 물결 그치게 하네.

소자구문도(小求聞道) 이 내 몸(찾아뵌 뜻은) 도(道) 듣기를 구하려 함이지

비투반일한(非偸半日) 반나절의 한가로움 취함이 아니로다.

 

율곡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봄에 예안(禮安, 안동)의 도산(陶山)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방문하였다. 이 시는 율곡이 퇴계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곳에 묵으면서 느낀 심정을 읊은 것이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56세였으며, 병으로 인해 시골로 돌아가 예안현(禮安縣)의 산골짜기 사이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있을 때였다. 율곡이 이틀을 묵고 떠나간 후 퇴계는 제자들에게 ‘후배가 가히 두렵다(後生可畏)’는 옛 말을 인용하며, 과연 식견이 높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상제께서 정미년 十월 어느날 경석에게 돈 三十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溪分洙泗 峰秀武夷山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活計經千卷 行屋數間 小求聞道 非偸半日

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도다. (행록 3장 47절)

그런데 『전경』은 위의 시의 3구와 4구를 5구와 6구로 바꾸어 기록하고 있으며, 파(派), 장(裝), 신(臣), 한(閑) 등이 원문에는 각각 파(波), 장(藏), 자(子), 한(閒)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상제님께서는 이 시를 통해 도를 찾고 구하는 태도를 알려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ㆍ병조ㆍ형조ㆍ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율곡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ㆍ경제ㆍ교육ㆍ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社倉設置), 대동법(大同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84년(선조 17) 음력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되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한이 그토록 많았던지 죽은 지 이틀 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저서로는 『학교모범』.『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성학집요』는 『대학』의 체계에 따라 유가의 경전과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후에 경연의 교재이자 유학의 입문서로서 애용된다. 『격몽요결』은 ‘무지몽매함을 깨뜨리는 중요한 비결’이란 뜻인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시대 서당에서 『소학』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서책 중의 하나이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다.

 

 

상제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제1장 32절)

 

위의 구절에서 김형렬은 상제님께 고대의 명인(名人)에 대해 언급하면서 율곡 이이(李珥)의 일화를 그 실례로 들었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도 그의 말에 동의하셨으니, 이 일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전래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율곡은 그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경연(經筵)에서 임금 선조(宣祖)에게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이순신과 이항복에게 비법(秘法)을 전수해 전란(戰亂)에 대비토록 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먼저 이순신과의 관련하여 알아보자. 충무공 이순신과는 같은 덕수 이씨로 촌수로 따지면 19촌이었다. 충무공이 하급 군관이었던 시절, 병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율곡은 충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동문 사람이라 하여 한 번 불러 만나보고자 하였지만 충무공은 군 내 인사권을 가진 율곡과 자신이 같은 문중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율곡은 죽기 수개월 전에 정적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파주와 처가가 있던 해주 석담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무렵 이순신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순신은 낮은 벼슬자리를 전전하던 무명의 관리에 불과했지만, 율곡은 장차 그가 쳐들어 올 왜군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인물임을 알고는 훗날 쓰일 방책으로 두보의 시를 천 번 읽을 것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안사(安史)의 난을 직접 겪었던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는 전쟁의 참상과 백성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 그리고 애국애민(愛國愛民)의 마음을 시를 통해 잘 표현해 두고 있었다. 율곡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두보의 이러한 시를 읽게 하여 앞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 와중에 겪어야 할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강인한 정신력을 키우게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율곡은 이항복에게도 임진왜란 때 쓰일 비책 하나를 일러주었다. 그것은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안 나올 때는 수건에 고춧가루를 싸서 눈을 문지르면 된다는 다소 뜻밖의 방법이었다. 이 비책은 훗날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할 때 사용된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병조판서였던 이항복은 여러 신하들의 의견과는 달리 명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국난을 타개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료들을 설득하여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는데 그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항복은 명나라에 청병 사신으로 가게 된 정곤수(鄭壽, 1538~1602)를 불러 그에게 율곡의 비법을 전해주었다. 정곤수는 명나라 황제 앞에서 고춧가루로 싼 수건을 눈에 문질러 눈물이 펑펑 솟아나게 만들었고, 이를 본 명 황제는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에 감동하여 결국 구원병을 보내주게 되었다.

율곡과 이순신, 이항복 사이에 얽힌 일화는 대인(大人)들 사이에서 가르침이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성리학자로서 정치가이며 교육자이기도 했던 율곡은, 시대의 문제들을 고민하고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한 대유학자였다. 이런 그가 다가올 임진왜란에 대비해 마련해 두었던 비책은, 왜적의 침탈로부터 이 강토와 백성을 보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