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姜太公)
강태공은 역사상 중요인물임에도 출신과 경력에 관해서는 주로 전설로만 알려져 있을뿐 실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은(殷)나라 때의 갑골문(甲骨文)에 그의 씨명인 여상(呂尙)의 영지였던 제(齊)나라의 이름이 기록돼있으나, 정작 그가 제상으로 있었던 주(周)나라의 초기 사료에는 여상이란 이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편에서 "동해 근처 출신이고, 선조는 사악(四岳)의 관직에서 우(禹)왕을 도와 치수사업을 전개했다. 일족의 본성은 강씨였으며 지족(支族)은 여(呂)땅으로 이주해 지명이름을 따 여씨를 가문 성으로 했다. 그의 집안은 본래 도축업이나 음식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강태공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또는 여상(呂尙), 자는 자아(子牙), 시호는 태공(太公), 제태공(齊太公), 강태공(姜太公)등 여러 개다. 강태공은 주 문왕의 조부(太公)가 기다렸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 했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강태공은 서백[西伯: 훗날 주(周)의 문왕]에 의해 등용되어 나라의 치란흥망(治亂興亡)에 대해서 강론했으며 군사력과 정치를 정비하는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서백은 은왕조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고,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강태공은 제(齊: 지금의 산동지방)나라를 봉지(封地)로 받아 창업군주가 되었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펼친 부국강병술에 의해 상공업과 어업이 발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여러 제후국들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주나라 문왕에게 발탁되기 전 강태공은 하릴없이 책을 읽거나 위수[渭水, 반계천(磻溪川)]에서 낚시를 하며 무위도식하였다. 그는 70이 넘도록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다. 결혼 후에도 그는 항상 책만 읽으며 무직으로 지내자 20년 넘게 그를 뒷바라지를 하던 부인 마(馬)씨는 견디다 못해 가출하였고 강태공은 식량이 떨어져 생활이 어려워지자 낚시를 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마씨 부인이 집을 나간 결정적인 계기가 된데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마씨 부인이 비가 오거든 마당에 펴 놓은 메벼를 거두어 놓도록 당부하고 일하러 나갔는데 도중에 비가 쏟아져 집에 돌아와 보니 메벼가 모두 물에 떠내려가고 없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낚시에 대해서도 곧은 낚시 바늘을 사용하며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은 게 아니라 세월을 낚았다는 설과 낚시 바늘을 물에 담그지 않고 수면 보다 세치( 9cm) 높게 띄웠다는 설이 있다. 태공조어이수삼촌(太公釣魚離水三寸)이란 말이 이 고사에서 생겨났다. 즉 강태공이 낚시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에게는 가난함도 아내의 가출도 초연하게 받아들이며 위수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세월을 낚는 낚시꾼’이라고 했다. 그가 세상에 굶주린 얼굴을 보이고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기에는 그의 가슴에 품은 뜻이 너무 원대했다.
위수는 그에게 있어 삶의 수련장(修鍊場)이었다. 낚시는 인내(忍耐)를, 위수의 일기변화는 천기를 읽는 지혜를, 그리고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을 얻는 도장(道場)이었다. 그는 위수에 낚시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것은 큰 물고기가 아니었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의 지혜와 연륜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알아주고 채택해 주는 큰 인물을 만나야 했다. 종국에까지 이루지 못한다면 그저 가난한 한 사람의 낚시꾼이었다는 것까지 감수한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인가는 자신에게 닥칠 커다란 운명의 변화에 확신이 있었다. 세상은 현자를 그냥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일개 낚시꾼인 그에게 보통사람이라면 인생의 종말의 시점에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 변화를 몰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주(周)나라 문왕(文王一西佰)이었다.
문왕이 사냥을 나가려고 할 때 태사가 “이번 사냥에서는 패왕을 보필할 신하를 얻을 것”이라는 점괘를 문왕에게 말했다. 문왕은“그런가.”하고 사냥을 나갔는데 위수(渭水) 북쪽 가에서 띠풀을 깔고 앉아 낚시를 하는 그를 만났다. 문왕은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묻는 말마다 지극히 현명한 대답만을 하는지라 “선군(先君)인 태공(太公)때부터 장래에 성인이 나타나서 주나라를 융성하게 이끌 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데 당신이야 말로 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문왕은 여상에게 태공망(太公望-주나라의 태공이 고대하던 사람)이라는 호(號)를 주고 사냥수레에 같이 타고 궁에 돌아온 후 그를 문왕 자신의 군사(軍師)에 임명했다.
문왕은 숭(崇), 밀수(密須), 견이(犬夷)를 무찌르고 위대한 도시 풍읍(豊邑)을 이루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은 주(周)에 소속되었다. 문왕의 이러한 업적은 태공망의 계략에 힘입은 것이다.
문왕의 뒤를 이은 태자 발[發-후에 무왕(武王)]이 폭군 주의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천하의 왕(王子)가 되자 태공망에게 제(齊)의 영구[營丘, 현 산동성 치박시 동북쪽]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封)했다. 제(齊)나라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영구에 도착한 강태공은 그 지역의 풍습을 유지하면서 의례를 간소화했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를 본 많은 제후들이 제나라로 귀순하였다.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어린 성왕(成王)은 강태공에게 주위의 제후를 징벌할 막강한 권한을 주었으며 강태공은 160여 세까지 제나라를 다스렸다.
초라한 일개 낚시꾼 노인은 때를 얻어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고,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악정을 일삼는 폭군 주를 멸망 시켰으며 제(齊)에 봉해지자 주변국을 정벌하여 대국이 되었다.
뒷날 제(齊) 나라 제후로 봉해져 부임하던 날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를 환송해주었다. 그런데 인파 속에 있던 초라한 행색의 한 노파가 그의 눈에 띄었다. 일찍이 그를 떠났던 아내였다. 노파를 수레 앞으로 불러오도록 명했다. 제후로 부임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가 버린 남편인줄 안 노파는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아내로 맞아 줄 것을 애원했다. 시종을 시켜 물 한 그릇을 가져오도록 한 강태공은 노파에게 물을 땅에 쏟게 한 후 다시 그 물을 그릇에 담으라고 했다. 노파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고 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 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이렇게 전하고 강태공은 뒤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태공은 그 후 어려울 때 자기를 위해 희생한 마씨부인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마씨 부인을 서낭신(城隍神)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軍事)와 모략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兵法)이며 주(周)의 권모술수에 말할 때 태공망이 그 시조(始祖)라고 말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후세에 용병술과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존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널리 알려진 병법서인 『육도(六韜)』도 강태공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병법은 후대의 병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漢)나라의 창업공신인 장량(張良)이 황석공 으로부터 받은 비서(秘書)는 태공의 병법과 관련되어 비전(秘傳)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량은 이 비서를 공부하여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또 『손자(孫子)』, 『오자(吳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 제가(諸家)의 병법사상도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근간(根幹)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창업군주나 공신들이 강태공이 내놓은 부국강병술로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거나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외에도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강태공의 이야기는 구전(口傳)을 통해 전설로 내려오다 명나라 때에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강태공은 후대에 지혜롭고 도술이 뛰어난 인물의 전형으로 중국 민중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상제님께서는 “「강 태공(姜太公)이 십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갖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예시 20절)라고 말씀하셨다.
“(…)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예시 22절)
강태공은 자신의 입신(立身)과 영달(榮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삼천 육백 개의 낚시를 소비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은 강태공이 처절한 삶을 통하여 내놓은 부국강병의 술법으로 천하의 대업을 이루었으나 그에 따른 보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이름은 디딜방아나 대문에 기록되어 사악한 귀신을 쫓는 풍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는 배은망덕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사람이 아니라 신명들이 태공의 은혜를 보답할 것이라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