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제위 B.C 246~210)은 BC 259년 조(趙)에 인질로 있던 자초[子楚, 후에 장양왕(藏襄王)이 됨]의 아들로 조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인 조희(趙姬)는 장양왕을 후원한 부유한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후에 일부 역사가들은 시황제가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그의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면은 초기 진나라 군주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법가(法家)의 인물을 기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 즉 한, 위, 조, 초, 연, 제(韓, 魏, 趙, 楚, 燕, 薺)를 정복하여 17년만인 39세 때에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구축하였다. 통일을 완성한 그는 삼황오제(三)의 공덕을 한 몸에 겸하였다는 뜻에서 황제(皇帝)와 최초(始)라는 뜻을 붙여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기로 했다. 이 후 황제의 이름을 2세, 3세 황제로 부르도록 하여 그 이름이 만세에 이르도록 했다.

진시황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실시하여 지방의 관리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시켜 통치하였다. 그는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하고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전 지역과 소통할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등을 단행했다. 이것은 정치적 통일에 호응하여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도 통일을 촉진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통일 정책은 후대의 중국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진시황은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고, 내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호족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BC 210년 진시황은 동쪽으로 순행하던 중 사구(沙丘)의 평대(平臺, 하북성 평향현)에서 진시황 37년 7월에 병으로 50세에 사망했다.

 

한편 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는 등 중앙집권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면 진시황을 연상시키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여산릉(驪山陵), 아방궁(阿房宮), 분서(焚書), 갱유(坑儒) 등을 살펴보자.

 

▶만리장성(萬里長城)

통일이 되기 오래전부터 북쪽의 흉노가 남하하여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燕)과 조(趙)와 진(晉)은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는데, 이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고 서쪽으로는 임조(감숙성 북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요동의 연무에 이르는 전체 길이가 만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병사와 인부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이나, 부역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몇 만 몇 십만에 이르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하면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陵墓)를 만들기 시작하여 그가 50세에 죽을 무렵이 되어 완성하였다. 36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이 대공사는 서안시(西安市) 동쪽 섬서성의 임동(臨童)으로부터 동쪽으로 5~6㎞되는 지점에 실시되었는데 여산릉이라고 하며 진시황릉이라고도 부른다. 또 진시황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능묘 안의 돔식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반짝이고, 지면에는 수은을 이용한 하천과 호수가 만들어져 천문, 지리 형세의 천하가 펼쳐져 있었다. 또 실내에는 문무백관의 자리가 차례대로 펼쳐져 있고, 고래기름에 의해 점등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공사에 무려 5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여산릉 공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또 하나의 대토목 공사는 ‘아방궁(阿房宮)’ 건축 공사였다. 역사 이래로 써오던 함양궁은 협소하여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궁전으로 위엄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아방궁을 짓기로 하였다. 아방궁을 지을 때 먼저 전전(前殿)을 짓기로 하였는데 동서의 길이가 5백 보(590m), 남북이 51장(115m), 위층에는 1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서는 높이 5장(11.5m)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이 건축 공사에도 무려 70만명의 강제 노역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분서(焚書), 갱유(坑儒)

통일을 이룩하기 전에 진시황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매우 귀담아 듣는 듯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룩하고 난 뒤에는 천하에서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진리로 여겨지기를 원했다. 이런 사상 통일을 위한 그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는게 이른바 분서(焚書)와 갱유(坑儒)이다.

진시황 34년(B.C 213년) 어느 날 수도 함양궁에서 천하통일을 경축하는 잔치가 푸짐하게 열리고 있었다. 진시황의 측근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시황의 공덕을 칭송하며 축배를 올렸다. 이때 제나라 출신의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앞에 나가 경전을 인용하여 옛 것을 찬미하고 현재를 풍자하는 발언을 하였다.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하였다.

승상 이사는 순우월의 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 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극단적인 탄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 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 등 이었다.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여 많은 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다만 의약(醫藥), 복서, 종수(種樹)​1)에 관한 서적만 남기도록 하였다. 이 분서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진시황을 비판하였다.

 

진시황 35년(B.C 214년)에 발생한 갱유(坑儒)는 사실상 사상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발단이 된 것은 방사(方士)​2)들의 배신행위 때문이였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천하통일을 한 진시황은 오직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생각하여 선술을 좋아하는 서복(徐福)[사기(史記)에는 서시(徐市)로 기록됨]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선단(船團)을 거느리게 하여 동양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차 때는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서복은 불사약을 구할 수가 없었고, 그대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B.C 212년 아방궁이 건립되자 진시황은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 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진시황은 진노했고, 폐하를 비방하는 관리들을 잡아들여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하여 그들을 모두 산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군주제 시대의 황제독재제도나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제와 같이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는 제도는 지도자가 출중할 때는 효과적으로 작동하나, 지도자가 어리석을 때는 최악으로 기능하게 된다. 진시황이 없는 진나라는 CPU가 없는 컴퓨터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이십 장으로 책 두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 종수지문(醫藥卜筮 種樹之文」이라 쓰시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도수이니라」하시고 한 권을 신원일의 집 뒷간에 묻고 또 한 권을 황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 (공사 제3장 17절)

 

위 구절의 ‘진시황의 해원도수’를 수도인 일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불사약을 구하지 못한 채 50세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진시황의 원을 상제님께서 풀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진시황에게 폭군의 아이콘을 가져다 준 대표적인 사건이 분서갱유이다. 상제님께서 쓰신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은 당시 불태우지 않아도 되었던 서적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시행하도록 한 분서는 오로지 학자를 탄압하고 학문을 없애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학식이 뛰어난 박사관들은 유가의 서적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을 자유롭게 소지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책의 시행과 그 성공을 위해서는 백성들의 법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보수성향이 강했던 유가세력들은 이 새로운 제도에 대하여 익히고 배우려 하기보다는 “옛 것을 들먹이며 현 제도를 비방하며”, “거리로 나가서는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분서령의 목적은 황제와 국가의 법령의 존엄을 유지하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치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갱유 사건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사들이 임금을 속이고 대역무도한 죄를 짓고 도망간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유생들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 되어진 사건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유교사상의 영향 아래, 많은 문인들에 의해서 이 사건은 분서사건과 짝을 이루며 ‘분’은 유가 경전을 조준한 것이고, ‘갱’은 (고의로) 유가들을 겨눈 것으로 여겼다. 갱유 사건에서 유가들의 피해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사들의 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생들이 연좌되어 함께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황제를 속이고, 정치 전반에 걸쳐 악의적인 비판을 하고 악화여론을 형성하는 방사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이 두 사건은 현 정책의 비판과 악의적인 여론몰이를 차단하려는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진시황의 문화전제는 사상을 통일하여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다지고자 하는 명확한 목적하에 시행되어 졌다.

 

진이 멸망한 뒤 새로 들어선 통일국가는 한(漢)이였다. 당시 한은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유가의 사상을 채택하였고 역사 기록 역시 유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진시황의 치적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평가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 오명은 무려 2,000년 동안 진시황이 손가락질 받도록 만들었다. 이런 불공평한 처우는 진시황으로 하여금 원(冤)을 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진(秦)은 원래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나 차츰 국력을 길러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이 후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펴 여러 지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어 갔다. 중국의 영어 표기인 차이나(China)도 진(Chi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진나라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청나라 멸망까지 약 2,000년에 걸친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 중국을 찬양하는 현대 중국에서 특히 주목되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유학자들을 탄압하는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대대로 좋지 못한 평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고 만인의 지탄을 받은 진시황을 억움함을 아시고 그의 원을 풀어주시는 공사를 보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1) 나무 심고 가꾸는 것

2) 선술로서 불로 장수약을 구하는 자들을 말함.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