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

 

주자(朱子, 1130~1200)는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이며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주자는 1130년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정중하였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 하였을때, 부친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것이 하늘이다.”하자 반문하기를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지요?”하였다. 그는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1143년 14세에 부친의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다. 24세에 연평(延平)선생인 이통(李侗, 1093~1163)을 만나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이고 주자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통을 만나 사숙하면서 유학으로 복귀하였고, 장남헌과의 교류, 육상산과의 강론을 통해 성리학 체계를 완성하였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강학에 힘썼다. 1175년 주희와 여조겸(呂祖謙:1137~81)이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근사록(近思錄)』을 편집하였다. 제목의 ‘근사’는『논어(論語)』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기에 주자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1177년에 완성되었다.  

 

주자는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지사로 근무한 시기(1179~81)에 그 동안 페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이 서원은 그 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자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대학(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 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 주석을 달았다. 그해 중용(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완성하였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자는 공맹(孔孟) 유학을 형이상학적 철학 체계로 완성하여 성리학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상 형성 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유학을 이기(理氣) 개념으로 체계화하여 형이상학적 구조를 완성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에서 불교와 도가에 뒤지지 않는 철학적 완성을 이루게 된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하는‘지식 중심적’관점과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핵심으로 하는‘이성주의’의 성립은 유학에서 인격 개념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인간의 도덕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지식과 이성의 힘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이기 개념으로 우주, 인간, 사회, 자연을 관통하는 학문체계를 정립하였다. 주자에서 인격은 인간의 도덕적 실천 지향성과 관련되는데,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개념인 성즉리(性卽理)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인 태극(太極)과 같은 존재로서의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기(氣)의 요소를 통하여 개개인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주자는『근사록』,『사서집주』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가 편찬한『주문공문집』, 제자들과의 문답을 정리하여

 편찬한『주자어류』를 통하여 그의 성리학적 사유를 파악할 수 있다.  

 

주자학은 중국에서 동아시아 세계로 파급되어 주변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본국 이상으로 이를 신봉한 것은 우리나라였다. 13세기 말의 고려시대 원에서 전해진 주자학은 이를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조선개국의 주역이 되어 주자학을 새로운 시대이념으로 내세운다. 다음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국가교학으로 채용되고, 16세기에는 이황, 이이의 2대 유(儒)가 나타나서 조선인의 유교로서 뿌리를 내렸다. 이 나라의 주자학 수용의 특징 중 하나는 조선 500년간에 걸쳐서 주자학의 일조를 관철한 점으로, 불교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양명학도 이단 사상으로서 엄격하게 거절되었다. 또한 주자학의 이기론을 더한층 파헤치는 한편, 주자의『문공가례』(관혼상제 안내서)를 제도로서 이식하여 조선 고래의 예속이나 불교의례를 유식(儒式)으로 개변했다. 이퇴계에서 시작하여 17세기의 송시열을 거쳐서 19세기의 이항로에 의해서 집대성된 주희의 문집전권에 걸친 정밀한 주석의 작업도 다른 국가에서는 예를 볼 수 없는 사업이었다. 주자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家康)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한편 주자가 1183년 경관이 뛰어난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후배를 양성하고 여름에 무이구곡을 유람하며 감상한 소감을 열 수의 시가를 적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를 방에다 걸어놓고 무이산의 경치를 상상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읊으면서 주자의 학문를 흠모하였다.  

주자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멀리 떨어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 정적(政敵)인 한탁주(韓侂冑)가 주자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는 매일 무이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1200년 그의 해금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가 죽을 때 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사후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 사당에 모셔졌다.

 상제님께서 주자를 유교종장으로 삼은 것은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그의 포부를 마음껏 펼쳐 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박해받으며 살다가 죽은 주자의 원(冤)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