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仙道)의 종장(宗長) · 일본명부(冥府) 최 수운
수운의 핵심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사상
조선말엽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 외세의 물결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로 민중을 위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수운(崔水雲)은 19세기 중엽인 1824년 10월 28일 경상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정에서 씌운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명으로 1864년 3월 10일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처형당하기까지 41세라는 결코 길지 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최제우(1824~1864)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 혹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도언(道彦), 호는 수운(水雲)이다. 그의 부친은 영남 일대에 널리 알려진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근암공(近庵公) 최옥(崔鋈)이며, 어머니는 재가녀(再嫁女)인 곡산(谷山) 한씨(韓氏)이다. 근암은 63세의 노경에 들어 수운을 얻었다. 근암은 문장과 도덕이 높아 사림(士林)의 사표가 되었으나 끝내 벼슬 없는 선비로 불운하게 살다가 한 평생을 마쳤다. 그는 특히 성리학의 연구에 힘쓰면서 주자와 퇴계의 학설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최제우는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는 제세의 뜻을 품고 10년간 주유팔로(周遊八路)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나와 있는 유·불·선의 가르침으로는 혼란한 세상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이던 1854년 처가(妻家)가 있던 울산 여시바윗골로 들어가 초가삼간을 짓고 새로운 진리 찾기에 몰두하였다.
그는 총명하여 한학을 배웠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붕괴와 국제정세의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3세 때 울산 출신의 박씨와 혼인하였고 4년 뒤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 복술 등의 잡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55년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이름 모를 승려[이인(異人) 또는 신인(神人)이라고도 함]로 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얻고는, 유학을 바탕으로 한 사색에서 벗어나 직접 하늘에 기도하는 방법으로 구도 방향을 바꾸게 된다. 1856년 여름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로 이어진다. 1859년에는 다시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그 무렵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기울어져 있었다.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란과 천재지변으로 크게 혼란한 분위기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여 텐진조약을 맺는 등 정세가 불안정하였다. 그래도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의 ‘불출산외(不出山外)’를 써 붙이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제선(濟宣)’에서‘제우(濟愚)’로 고쳤다. 해가 바뀌자‘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함에 사특한 것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세간의 사람들과 같이 돌아가지 않으리라(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는 입춘시를 벽에 써 붙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구도에 열중하였다.『동학경전』,「입춘시」
1860년(庚申年) 4월 수운의 나이 37세 때 지극한 정성으로 일심 수도 끝에 신비한 종교체험을 통하여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다. 이로써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게 되는데 수운은 이를 동학(東學)이라 이름 하였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특히 천주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조선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니 최제우는 이를 시대적 불안으로 받아 들여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고유의 신앙으로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수운의 핵심사상은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이다. 이는 상제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심으로써 후천선경과 지상신선을 실현하고 세계개벽을 이룰 수 있다는 후천개벽 사상으로 나타났다. 수운은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천도(天道) 혹은 무극대도(無極大道)라 부르며, 스스로 “(상제님으로부터 받은)나의 도는 지금도 옛날에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요, 지금에도 옛날에도 견줄 데가 없는 법이다(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라고 하여, 전대미문의 새로운 진리라고 주창하였다.
1861년 6월, 드디어 수운은 상제님의 제세대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적서(嫡庶)나 반상(班常)이라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만민평등의 가르침은 당시 혼란한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고대하던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훗날 수운의 사상을 이어 받는 최시형과 같이 글을 모르는 하층민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고 한다. 수운에게 천령(天靈)이 강림했다는 소문이 돌고 많은 사람들이 용담정에 모여들자 경상도 지방의 유학자들은 자연히 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수운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시 신분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開闢)가 도래함을 믿으며 영부와 주문을 수련도구로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고루한 유학자들은 수운을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사술(邪術)을 부리는 이단자로 몰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들은 수운의 부친 근암공을 당대의 유학자로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운의 이러한 반 성리학적 행동을 더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수운은 상제님을 모시는 올바른 태도가 성∙경∙신에 있다고 말한다. 성∙경∙신을 간직하고 힘써 공부하면 진리를 통달하여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을 밝히는 노력을 넘어서 성∙경∙신으로 상제님을 모셔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수운사상의 핵심이다. 수운이 도달한 경지는 도덕의 경지를 넘어선 종교 또는 도의 경지요. 상제님을 모시는 종교적 헌신에 의해서라야 성∙경∙신이라는 도덕이 비로소 그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천∙인(天∙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경∙신을 도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要訣)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 교리는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파급되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1863년에는 교세가 교인 3,000여명, 접소 14개소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을 북접 대도주(北接大道主)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通)을 계승시켜 교주로 삼았다. 1864년(甲子年)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조정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참수되었다.
수운은“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하단 말가.”(교훈가)라고 말한 바와 같이, 시천주를 통한 후천개벽을 부르짖었다. 그는 개벽의 첫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였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개벽이란 대변화의 시기를 예고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하였으되 수운이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셨다고 하셨다. 즉 수운은 유교의 전헌(典憲: 법 또는 규범)이라는 큰 장벽을 넘지 못해 상제님께서 주신 제세대도(濟世大道)의 참뜻을 밝히는 데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유교의 전헌은 그 시대를 지배하던 이념인 성리학이 깊게 뿌리내린 사회적 상황을 의미한다. 어찌되었든 수운이 상제님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천지대도(天地大道)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죽은 최수운을 해원(解冤)시키고자 선도(仙道)의 종장(宗長)과 일본명부(日本冥府)로 임명하셨다.
상제님께서는‘왜 수운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일본의 명부(冥府)로 임명하셨을까?’그 의문을 풀어보기로 하자. 먼저 수운이 최초로 강령체험을 할 때, 그와 천주와의 주고받은 문답을 살펴보자.
문: 그러면 서도(西道)로서 사람을 가르치오리까?
답: 아니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되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라 하고 그 형 상은 궁궁(弓弓)이며 또 태극(太極)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되 나와 같이 되게 한 즉, 네 또한 장생(長生)하야 덕을 천하에 펴리라.(포덕문)
“入道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無爲而化 될 것이니 地上神仙 네 아니냐” (교훈가)
동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신선, 선인, 선약이라는 용어 역시 도교의 신선사상과 연계가 되고 궁궁(弓弓) 을을(乙乙) 가가(家家) 송송(松松)이라는 부적의 비결과 주술적 처방이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 선도와 관련이 있는 수운을 해원의 차원에서 선도의 종장으로 임명 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의 명부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 일시천하통일지기, 일월대명지기를 일본에게 맡기고 조선의 국운을 지키려고 하신 데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유법, 불법, 선법 중에서 선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판단하시어, 일본을 수운에게 맡겨 서양세력으로부터 동양을 지키고, 이를 위해 신선의 힘과 선술이 필요하므로 선도의 종장인 수운을 일본명부로 임명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