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영웅 관운장(關雲長)

 

관운장(160~219)은 서기 200년 전후인 후한(後漢)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실존했던 역사상의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9척(272cm)의 키에 얼굴은 잘 익은 대추처럼 붉었으며, 멋진 수염을 휘날리며 적토마(赤兎馬)위에 올라앉아 청용언월도(靑龍偃月刀)를 손에 들고 전쟁터를 누비는 그의 호쾌한 활약상은 나관중(羅貫中)의『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정사(正史)인『삼국지』에 남아있는 모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기록을 통해 볼 때 분명히 그의 의리(義理)는 세인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관운장이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이나 삼국지의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도(道)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중책을 담당하고 있다. 관운장에 대하여 전경(典經) 여러 곳에 언급되었고, 상제님께서 교운(敎運)을 펼치신 후, 자주 관운장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 아니라, 도인들이 지성으로 봉송하는 주문의 진법주(眞法呪), 운장주(雲長呪), 해마주(解魔呪)에 있을 정도로 신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관운장이 어떤 인물이며, 왜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관운장은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蜀漢)의 장수이다. 본명은 관우(關羽)이고 자는 운장(雲長)이며, 지금의 산서성 운성현(山西省 運城縣) 상평향 상평촌(常平鄕 常平村)인 하동군 해현 하마촌(河東郡 解縣 河溤村)에서 태어났다.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현(褶縣, 현 하북성에 소재)에서 유비(劉備),장비(張飛)와 도원결의(桃園結義)로서 의형제를 맺어 평생토록 그 대의(大義)를 맺어 저버리지 않았다. 조조(曹操)에 맞서 이들 의형제가 대항할 때 관운장은 하비성(下邳城)을 책임지며 형님 유비의 가족인 두부인과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조의 공격으로 하비성이 함락되고 형님 가족의 생사를 모르게 되자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조조의 부하 장수이면서 평소 관운장과 친했던 장료(張遼)로부터 ‘자결 삼불가설(三不可說)’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여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여기서 관운장은 투항의 조건으로 “유비의 두 부인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하고, 주군(主君)의 생사(生死)를 알면 그 곳이 천만리 멀리 떨어졌다 해도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러한 관운장의 의리에 감복을 받은 조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마음을 돌려 자기 휘하에 두고 싶었했다.  조조는 어느 날 관운장이 입고 있는 옷(綠袍)이 남루한 것을 보고 새 옷(錦袍)을 내주며 입으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가 관운장이 아직도 녹포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자, 관운장은 “이것은 일찍이 유황숙 께서 주신 은의입니다. 아무리 누더기가 되더라도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즐거운 기쁨을 누립니다. 공께서 주신 비단옷은 이 옷 속에 입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아!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다. 이토록 충절한 장부도 있단 말인가!”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관운장은 조조의 포로로 있는 동안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그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인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적벽대전(赤壁大戰)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워서, 그 당시 조조의 목을 베고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으나, 과거 조조에게서  받았던 인간적인 빚을 생각하여 그와 군사들을 살려 놓아줄 정도로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그리하여 관운장의 그림에는 청룡도와 함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있다. 그 책이 바로 공자(孔子)가 노(魯)국 12제후들의 시대별 역사를 기록한 책『춘추』였다. 관우는 일평생 그 책을 지니고 다니며 틈 날 때 마다 되풀이해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힌 책으로 행위의 원인에 대한 결과를 분명히 밝히고 있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는 책이다. ‘춘무인(春無仁)이며 추무의(秋無儀)라.’ 춘추(春秋)란 ‘봄에 좋은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면 가을에 좋은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라는 인과(因果)관계를 분명히 하는 말로써, 그는 이 춘추를 통해 대인대의(大人大義)의 기상을 세우고 실천해 왔다. 

그는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맥성(麥城, 지금의 호북성)에서 오․위(吳魏)동맹군인 조조와 손권의 협공으로 오(吳)나라의 포로가 된 후 여몽에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무신(武神)으로 추앙 받는 그는 무용(武勇)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의(信義)를 생명(生命)보다 중히 여긴 군신(軍神) 임에도 불구하고 신용을 중시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받아‘재물신(財物神)’으로도 숭배 받게 된다. 이러한 점이 현세의 복을 중요시하는 중국인들에게 관운장 신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중에 널리 펴져나간 관우 신앙은 통치자들에 의하여 점점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민간신앙에서 국가적인 신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북송(北宋)의 휘종(徽宗,제위기간 1110~1125)은 관운장을 왕(王)으로 승격시켰고, 이후 원(元), 명(明), 청(淸)을 거치는 동안 관운장은 역대 제왕들의 추증(追贈)¹을 끊임없이 받아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전까지만 해도 중국에 1천 6백여 개의 관왕묘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그 신앙이 얼마나 대단 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 추증(追贈): 죽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올려 주는 것
 

그에 대한 신앙이 우리나라에 오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1592년)때 명(明)나라 장수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는데 선조 31년(1598년) 해군제독 진린(陳璘)이 남산아래 도동에 주둔하여 그 후원에 관왕묘를 세운 것이 남묘(南廟)이다. 진린이 싸움에서 불릴 할 때마다 관운장이 홀연히 나타나 어려움에서 구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같은 해에  성주, 강진, 안동, 남원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5년 당시 명나라 선종(禪宗)은 조선에서 왜병을 격퇴시킨 공은 오로지 관운장의 음조(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내탕금² 4천량을 보내 동대문 밖 숭인동에 관왕묘를 짓게 했다. 이후부터 조선조정, 특히 왕가에서는 열성으로 신앙하여 융복(戎服)³을 입은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제를 지내며, 열병(閱兵)이 있을 때마다 임금이 이곳에 납시어 무운(武運)을 빌었다고 한다.「징비록」이나「임진록」등에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도 관운장의 신조(神助)에 힘입어 승리하게 된 영험기와 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민간에서도 관성교(關聖敎)라는 명칭으로 신앙이 성행하였고, 각처에 산재되어 있는 관왕묘에 보면 관운장을 신령으로 모시게 된 신비한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한편 여(呂)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오면 해를 입는다고 한다. 관운장이 여몽(呂蒙)에게 최후를 맞아서 그의 영혼이 아직도 여 씨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서울에는 숭인동의 동묘(東廟), 남산 도동(挑洞)의 남묘(南廟), 혜화동의 북묘(北廟), 서대문 밖 천연동의 서묘(西廟) 그리고 종로 보신각 뒤에 중묘(中廟)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묘와 남묘(도동 화재 후 사당동에 복구)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중국의 낙양(洛陽)에는 관운장의 묘인‘관림(關林)’⁴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공자의 무덤인‘공림(孔林)’과 더불어 관우의 무덤인‘관림(關林)’을‘이림(二林)’으로 부르고, 문무(文武)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존(推尊)하고 있다. 오늘날‘관제묘(關帝廟)’라는 관우의 사당을 중국의 전역에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운장을 신앙이라는 측면에 보면 중국뿐 아니라 화교들이 살고 있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세계전역에 널리 펴져 세인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다.  


2. 내탕금((內帑金): 내탕고에 넣어 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
3. 융복(戎服): 옛 군복의 하나. 무신(武臣)이 입었으며, 문신(文臣)이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임금을 호종(扈從)하느라 입었다.
4. 관림(關林):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의 무덤을‘능(陵)’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무덤을‘림(林)’이라 칭한다. 

 

상제께서도 인정하셨듯이 조선은 예로부터 신명대접을 극진히 해왔다. 같은 동양인 이면서 중국인은 합리적이라면 조선민족은 보다 신비적이었다. 신비적인 것은 신(神)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요소이다. 중국인이 이성적이라면 한국인의 기질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신에게 제를 지내고 나서는 다 같이 가무음주(歌舞飮酒)를 즐겼다는 기록이 중국 측 사료에 나온다. 기분 좋은 일을 맞으면 ‘신난다, 신명난다, 신바람 난다’ 등의 말을 쓰는 것도 이런 한국인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신에 대한 태도는 공자가 “논어(論語)”에서 밝힌 몇 마디 말로써 대변할 수 있다. 즉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이다. 이것은 신명을 예로써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신(神)과 인간(人間)이 같은 생활의 장에 공존하며 상부상조 하고 있다.

한편 우리 도(道)에서 관운장은 복마(伏魔)와 해마의 임무를 띠고 있다.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관성제군)   (행록 5장 38절)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관성제군)   (교운 1장 30절)

 

상제께서 1871년 조선에 강세하셔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이유는 이 세상이 상극에 지배되어 원한이 맺히고 쌓였기 때문이었으며, 그 근본원인은 인간계가 아닌 신명계의 착란(錯亂) 때문이었다. 사람도 정신이 착란 되면 행동이 이상 하듯이 신명계가 착란 되면 인간계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리하여 상제께서 신명계(神明界), 즉 명부공사(冥府公事)를 먼저 단행하여 각국 명부를 새로운 분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삼계복마대제(三界伏魔大帝)와 삼계해마 대제(三界解魔 大帝)로  관운장을 앉히셨다. 삼계는 천‧지‧인(天地人) 삼계를 말함이며, 복마(伏魔)는 아주 멀리까지 가서 마귀를 진압하는 일을 가르키며, 해마(解魔)는 상제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복마의 발동이 있는데, 복마의 발동을 풀어주는 즉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대제(大帝)는 그 임무를 맡고 있는 수장이 되는 분을 말한다. 

 관운장이 신명으로서 천지공사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전경(典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상제님께서 종도 신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祭員) 신경언(辛敬彦)의 집에 이르러 머물고 계실 때, 그와 그 가족들에게 가라사대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하시고 양지에 써서 불사르시니, 경언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이튿날 경언과 다른 제원이 관묘에 봉심할 때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간 곳이 없으므로 제원들은 괴상하게 여겼으되, 경언은 상제께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관운장이 공사에 진력하기 위하여 비록 초상으로라도 그 힘씀을 나타낸 것이라고 깨달았다.」(권지 2장 21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제님께서 쓰시고자 내신 것이다.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늘이 쓰고자 하는데 응하지 않으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인간계를 다녀간 신명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관운장은 우리 조선에 1592년(壬辰年)부터 35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에 상제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이다.“황응종이 노랑닭 한 마리를 상제님께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밤중에 형렬에게 그 닭을 잡아 삶게 하고, 김형렬, 한공숙, 류찬명, 김자현, 김갑칠, 김송환, 김광찬, 황응종 등과 나눠 잡수시고, 운장주(雲長呪)를 지으셔서 그들에게 단번에 외우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때의 운장주이니라.

  「天下英雄 關雲長 依幕處近聽天地八位諸將 六丁六甲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營 邪鬼唵唵喼喼如律令娑婆啊」(교운 1장 22절)

 이 주문은 천지공사에 삼계해마대제(三界解魔大帝)로서 관운장이 도인들의 주문송독에 의하여 복마의 발동이 있을 때 어느 때라도 응하여 해마를 하게끔 약속된 주문이다. 상제께서 이 운장주를 만드시고, 과연 계획하신대로 신응 하는지를 알아 보시기 위하여 시험을 하셨다. 상제께서는“…운장주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리라.”고(행록 3장 31절) 말씀하셨다. 이렇듯이 천지공사에서 관운장은 비록 우리나라에만 계속 있는 던게 아니라, 때로는 용무에 의하여 서양(西洋)으로 이동(移動)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써“…「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느니라」고 일러주셨다.”라는(행록 4장 11절) 구절이 있다. 신명은 천지공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인간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음적인 세계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관운장의 일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난세에 인간으로서 인간의 바른 도리를 행할 때에 그 인생의 가치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관운장이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편안만을 추구 하였다면, 한때의 편안함과 부귀영화를 누렸겠지만, 그는 모진 고통을 감수하고 신의를 잘 지켜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상제님의 인정을 받아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참여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관운장의 대의와 대순에서 말하는 대의는 차이점이 있다.“해원상생․보은상생의 원리를 종교의 법리로 화민정세(化民靖世)하시어 인세에 낙원을 이룩한다 하심은 광구천하․광제창생의 대의이다.”(『대순지침』,20쪽)라는 말씀과 같이 지상천국건설이 광구천하, 광제창생의 대의임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대순지침에 다음 구절이 있다.

 “함지사지이후(陷之死地而後)에 생(生)하고 치지망지이후(致之亡地而後)에 존(存)한다는 옛사람의 말이 있음과 같이 복(福)은 복마(伏魔)로 풀이함은 화복(禍福)이라 말과 대등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겁액에 굴복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데서 탈선이 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앞길을 막아 버리는 사례가 많다.”

 “신명공판(神明公判)이란 운수를 받는 자리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고 수도과정에서 먼저 받게 되므로, 상제께서도 “나는 해마(解魔)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伏魔)의 발동이 있으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고 타이르셨으니 깊이 명심하라.“(『대순지침』,94쪽)  

 우리 도는 신도이므로 화복이 먼저오고 복마의 발동이 있으니, 그 겁액을 잘 견디어 일심이 되어 수도에 정진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생사가 달려 있으니 탈선되지 말고 수도에 정진하여 성공하는 그날까지 정진 하여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