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생지덕 (好生之德)
                                                                                                                                                                                                                                    

‘호생지덕(好生之德)’이란 말은 ‘생명을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의미하는 고사 성어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서경(書經)』「대우모 (大禹謨)」에 나타나 있습니다. 순(舜)임금이 신하인 고요(皐陶)에게 대법관으로서 자신을 잘 보필하여 정치가 잘 행하여질 수 있도록한 공로를 치하한 대목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고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치하의 덕을 모두 순임금의 덕으로 돌렸습니다.


 “제왕의 덕은 허물이 없으셔서, 아래를 대하실 때는 간략하게 하시고, 대중을 통솔하실 때는 너그러움으로 하시며, 벌은 자손에게는 미치지 않게 하시고, 상은 대대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실수로 저지른 죄는 용서하여 처벌을 작게 하시고, 고의로 저지른 죄는 형벌로 다스리되 무겁게 하시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벌하시고, 공은 의심스러워도 후하게 상을 내리십니다. 무고하게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차라리 법을 지키는 자세를 굽히시니, 제왕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관리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皐陶曰 “帝德岡愆 臨下以簡 御衆以寬 罪弗及嗣 賞延于世 宥過無大 刑故無小 罪惟輕 功疑惟重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好生之德 洽于民心 玆用不犯于有司)”

 위의 글에 나타나있는 것과 같이 호생지덕은 순임금이 형벌을 가할 때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지키는 자세를 굽히는 길을 택하는 것에서 그 뜻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생지덕’의 사전적 의미가 ‘사형에 처할 죄인을 특사하여 살려 주는 제왕의 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여 죽이지 않는 덕으로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 훌륭한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호생지덕’이란 말은 군생만물을 뇌성으로 보화만방 하시는 지대지성한 삼계의 지존으로 만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상제님의 덕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시지 않을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습니다. 유년기의 어느 해 가을에는 농부들이 추수한 벼를 말리면서 새를 쫓는 것을 보시고 “새가 한 알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니 어떻게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 살려 보려고 애를 쓸 수 있을까.” 하시며 어른들의 야박함에 마음을 태우신 대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증산의 생애와 사상』 p.32~33 참조) 또한 겨울에 상제님께서 불가지 김 성국의 집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김 덕찬과 김 성국이 꿩이 많이 날아와서 밭에 안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권지 제1장 26절) 또 어느날 상제님께서 김익찬(金益贊)을 데리시고 전주 세천(細川)을 지나실 때의 일입니다. “일본인 포수가 냇물 위에 앉아 있는 기러기 떼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시고 「차마 보지 못하겠노라.」 하시고 왼발로 땅을 한 번 구르시고 그 자리에 서시니, 그 찰나에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지라. 그 뒤에 상제님께서 발을 옮기시더니 그제야 총소리가 들렸도다.”(권지 제2장 5절) 이 또한 상제님의 호생지덕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기러기는 짝을 잃더라도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합니 다. 비록 하나의 새떼이지만 도와 질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러기 떼를 해하시는 것을 차마보지 못하고 기러기 떼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상제님의 호생의 덕이 어찌 초목과 군생에만 머물겠습니까?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사멸에 빠진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무수한 이적과 치병의 행적 곳곳에서 그 지극하신 호생지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천세상은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출현하였고, 그들의 상극적인 웅패의 술수는 선천이란 세계를 원과 한으로 점철된 포원의 세상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쌓이고 맺힌 원한은 이 세상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진멸(盡滅)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제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지 오래되었도다.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정세하리라.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好生)의 덕(德)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 (교운 제1장 16절) 상제님께서는 죄로써 먹고 살았던 선천 영웅시대와는 달리, 후천의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 수 있도록 다름 아닌 상생의 도로서 창생을 새롭게 하시고 세상을 바로 잡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아직 상극적 잔재가 뿌리 깊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방심하면 그 잔재들은 또 다른 척과 원한을 재생산하게 합니다. 이를 뿌리뽑고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척을 풀고 상생의 도를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각자 삶을 도모하는 것이고 후천선경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척이란 항상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시비하는 것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들어오다 보니, 나의 것임을 자각(自覺)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 척을 받아 풀기보다는 시비하여 다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돌아간 척은 다시 더 크게 돌아옵니다. 해원이란 이 척을 받아서 풀 때 이루어집니다.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니라.”(교법 제1장 56절) 상생의 길로 나가기란 이처럼 무척 어렵습니다. 이러한 척을 받아 감당하고 풀어 나갈 수 있는 힘, 그 원동력이 호생의 덕이며 상제님께서는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한다고 당부 하셨습니다.


호생의 덕을 쌓는 것이 바로 포덕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너희는 손에 살릴 생 (生) 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니냐 마음을 게을리 말라”(예시 87절)고 말씀하셨고, “「(…)하루 짚신 세 켤레를 닳기면서 죽음을 밟아 병자를 구하러 다니리니 이렇게 급박할 때 나를 믿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므로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예시 43절)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천지가 성공하는 때를 만났습니다. 만물이 가을바람에 따라 떨어져 멸하기도, 혹은 성숙되어 열매를 얻기도 하듯, 사람도 참된 사람은 큰 열매를 얻어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하게 되고, 거짓된 사람은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천운구인(天運求人)의 시대를 맞이하여 상제님의 한량없는 도와 덕를 통하여 손에 살릴 生자를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바로 사람들에게 살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는 대도의 이치와 법방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상제님 말씀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는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지만 그들의 신명은 알고 덕은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하셨으니 생각과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호생지덕을 기르고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하늘의 도를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을 『주역』「상경」에 건(乾)이라 하였습니다. 형체의 하늘을 천(天)이라 하면 건(乾)은 하늘의 정신을 말합니다. 그 정신은 다름 아닌 우주만물을 살리고자하는 생의(生意) 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 바로 호생지덕일 것입니다. 호생지덕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을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교법 제3장 2절)고 하신 때문입니다. 즉 모든 생명은 물론 생명이 없는 흙 바른 벽에도 신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삼재(三才)의 하나인 인간 생명의 소중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4년간 OECD 국가 중에서 부동의 자살률 1위라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자아 상실과 생명경시 풍조의 확산일 것입 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가치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도로 발전하는 물질문명과 과도한 경쟁,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호생지덕의 중요성을 깨닫고 함양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과, 인간의 참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성의 회복에 중요한 덕목으로 사려 됩니다.

 이에 우리 수도인들의 솔선과 진정한 포덕은 자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아를 되찾고, 인간의 참된 삶의 길을 살아 갈 수 있는 활인적선(活人積善)의 호생의 덕을 쌓는 중요한 실천이며 상제님의 구제창생의 대의에 이바지하는 일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바입니다.

 

​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