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불언 침불언
‘말’이란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자신의 소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중요한 의사소통의 매체이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이 하는 말은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에 대한 응당한 책임과 과보(果報)가 반드시 따르는 것이 정당한 이치(理致)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상대가 없는 자리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허물을 들추는 행위들을 너무 가벼이 하고, 심지어 없는 사실까지도 있는 듯이 만들어 상대방을 모함하거나 궁지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도모하는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스스럼없이 일삼아지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인터넷상이나 모바일을 통한 지나친 비방과 모욕적인 악성댓글이 요즘 종종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악성댓글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인격적 손상이나 정신적인 상해를 입히고 심한 경우는 자살충동까지도 몰아가는 무서운 결과를 빚어낸다. 나아가 이는 사회윤리의 근간을 흔들고 나아가 국민정서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식불언(食不言)이라 하였으니 먹는 것을 말하지 말며 침불언(寢不言)이라 하였으니 남의 누행을 말하지 말라.”(교법 제1장 60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단면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흔히 ‘사람으로 죄 없기가 어렵다’는 뜻의 한자성어를 ‘인숙무죄(人孰無罪)’라 한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죄가 있고, 사람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선천이 상극지리에 지배되어 있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나 자신보다 나 외의 존재의 덕(德)으로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은 물과 공기와 같은 자연으로부터 혜택을 입어야 하고, 부모의 수고로움으로 생육(生育) 될 수 있으며, 국가 사회는 물론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 덕택으로 인하여 살아 갈 수 있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월동안 수없는 노고로 축적되어온 문명의 혜택으로 우리의 현재의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죄가 없어도 있는 듯, 항상 보은(報恩)의 길을 생각하며, 일상에서 자신의 언행이나 행동을 깊게 살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에게 덕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과부족을 고쳐 자신의 앞길을 닦고 열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덕 닦기에 힘쓰지 않고, 오히려 남에 대한 흉과 허물을 들추기를 좋아하고,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운수를 그릇되게 만드는 것이니 ‘식불언 침불언’은 이를 크게 경계하신 말씀으로 사려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제 노릇 제가 하는데 제 몸은 생각지 못하고 어찌 남의 시비를 말하리오”(교법 제1장 20절)라고 하셨다.
또 “한 고조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나니 너희들은 아무 것도 베풀 것이 없는지라. 다만 언덕(言德)을 잘 가져 남에게 말을 선하게 하면 그가 잘 되고 그 여음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악하게 하면 그에게 해를 입히고 그 여음이 밀려와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 삼갈지니라 하셨다.” (교법 제2장 50절)라고 하셨으니 대운(大運)과 대통(大通)이라는 목적을 두고 수도에 전념해 나가는 우리 수도인 에게 남을 비난하거나 남의 허물을 들추는 행위는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득(得)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행위가 스스로에게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며 나가서는 척(戚)을 맺고 원한을 사게 하여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결과만 초래할 뿐인 것이다.
옛날 중국 춘추 전국시대(BC 770∼BC 221)에 제(齊)나라의 관중과 포숙 간의 깊은 우의(友誼)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사기(史記)』「관안열전(管晏列傳)」에 관중이 포숙을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라고 하였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 대나 하였는데, 항상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였다. 이렇듯 관중에 대한 포숙의 깊은 우정이 오늘 날까지 미담으로 전해져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은 남을 진실로 덕(德) 있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던 관중과 포숙의 우정 어린 미덕은 한 갓 옛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닌 상생대도의 실천적 윤리로 우리의 가슴속 깊이 담아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현재 우리 사회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한 몸부림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는 후천이라는 인존시대(人尊時代) 일 것이다. 이 시대를 빨리 당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상생과 화합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윤리에 대한 의식이 보다 더 강화되고 수준이 향상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현 세태는 많은 우려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식불언(食不言) 침불언(寢不言)’은 이러한 문제를 잘 지적해 주신 것이며 동시에 상생윤리의 지름길을 깨우쳐 주신 말씀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상생(相生)의 실천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남의 허물과 누행을 함부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싸주며 남에 대하여 좋게 말하는 것이 상생의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우리 수도인 이 먼저 솔선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