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

 

이 글은 상제님께서 화천 하신 후 거처하시던 방에서 물이 들어있는 흰 병이 발견되었는데, 그 병마개로 쓰인 종이에 병세문과 함께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글은 ‘길한 꽃이 피면 길한 열매가 맺고 흉한 꽂이 피면 흉한 열매가 맺는다.’는 평범한 이치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 글이 병세문과 함께 병마개로 쓰여 진 이유를 ‘병마개’가 음(音)으로 ‘병을 막는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때, 앞으로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병겁과 그 대책에 관계되는 크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직관할 수 있다. 

이 병겁에 관해서는 상제님께서 전경에 앞날을 위하여 종도들을 격려하여 이르시는 내용이 있다. "바둑에서 한 수만 높으면 이기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 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 선천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으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 (공사 제1장 36절)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의 병겁은 인류가 피할 수 없는 필연의 과정임을 알 수 있고 그 병겁에는 어떤 기이한 법도 진귀한 약품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당부 하셨다. 위의 글이 병세문과 함께 쓰여 있음은 일상생활 속에 일어나는 단순한 꽃과 열매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어 천지의 성공과 함께 인간으로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하는 자아대성(自我大成)의 크나큰 꽃과 열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병세문의 요지(要旨) 또한 의통에 관한 말씀이다. 무릇 병에는 크고 작은 병이 있고  큰 병의 약은 안심안신(安心安身)이다. 크고 작은 병이 무도(無道)로부터 나오지만 도가 있고 그 도를 얻으면 대병과 소병이 저절로 낫는다. 그리고 의통(醫統)은 아버지와 임금과 스승의 은의를 잊은 무도로 인하여 모두 병들어 버린 천하에 다시 잃어버린 충, 효, 열을 다시 찾아 세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엄한 생사판단 있고 대인대의(大仁大義)라야만 무병(無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의통은 사람을 살려서 이끌어 가는 것임을 아래의 글에 알 수 있다.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 無依無托 不可不文字戒於人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무의무탁 불가불문자계어인

宮商角微羽 聖人乃作 先天下之職 先天下之業 職者醫也 業者統也 聖之職聖之業

궁상각치우 성인내작 선천하지직  선천하지업 직자의야 업자통야  성지직성지업

 

조선국의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이 의탁할 곳이 없어 불가불 문자로 사람을 경계하노니, 궁상각치우는 성인이 만들었다. 천하에 우선되어야 할 직, 천하에 우선되어야 할 업이 있으니, 그 직(맡은 일)은 살리는 것(醫)이고, 그 업(경영)은 이끌어 나가는 것(統)이다. 이것이 성스러운 직과 성스러운 업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하에 우선되어야 할 성스러운 직업이 의통이고, 이 의통은 살려서 이끌고 가는 것이니 이는 곧 포덕사업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 의통의 내용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포덕사업의 진정한 의미인가를 헤아릴 수 있으며, 이 직을 잘 경영하여 우리는 대인대의 무병이라는 경계를 넘어야 할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꽃은 각자의 마음일 것이다. 대순지침에 마음은 “일신을 주관하여 만기를 통솔하므로 모든 병과 악을 낚아 들이는 것이 곧 마음이다.”고 하시였고, 전경에도 “병은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일어난다(病自己而發).”고 하셨다. 하지만 마음을 잘 먹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상황과 대상에 대하여 평정심을 잃기 쉽고, 우리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은 옳은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잘못된 성격과 체질은 자신의 고정된 틀에 벗어나지 못하여 대인관계와 일에 많은 장애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 경, 신을 통하여 심성과 기질을 깊이 연마하지 않으면 이 경계를 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잘 닦아 스스로의 속임이 없고 탐욕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음, 인간의 본성을 회복한다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대인관계 속에서이다. 길한 꽃은 인화(人和)이며 다른 말로 합덕(合德)이라 할 수 있겠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 부부간에 화하면 가정의 길한 꽃이 피어나고, 반대로 가정의 화기를 잃으면 당연히 흉한 꽃을 피우게 되고 가정의 어려움이 들어 올 것이다. 정부와 국민이 화하고, 사주와 근로자가 화하면 국가사회에 번영이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것이고, 나아가 나라 간에 화해지면 바로 세계의 평화인 도화낙원을 이룩하는 것임은 자명하다. 도내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도인 상호간 그리고 방면 간 나아가 종단까지 그 이치는 같을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길한 열매는 화합과 상생으로 맺는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결과는 필연의 그 시작과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에서의 연기론(緣起論)은 이러한 인과법칙(因果法則)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길한 꽃이 피면 길한 열매가 맺고 흉한 꽂이 피면 흉한 열매가 맺는다.’는 이 글은 또한 필연의 인과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불역(不易)의 천운구인(天運救人)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피운 그 꽃은 장차  돌이킬 수 없는 생사의 갈림 길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우리는 병세문의 안심안신과 대인대의 그리고 의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길한 꽃을 피우고 길한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