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하자 불고가사 (爲天下者不顧家事)
수도과정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씀 중의 한 구절이 위천하자불고가사이다. 여기서 불고가사는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의미를 들어 설명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왜 ‘위천하자불고가사’ 라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전경』의 상제님 말씀을 보면, “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위천하자불고가사(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爲天下者不顧家事)”를 말씀하시고 후구(後句)에 “걸・탕왕의 선악(善惡)의 일이 다 이윤(伊尹)에 있다.” 고 하셨다.(공사 3장 39절)
위천하자불고가사는 초패왕(項羽)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한 말로 통감절요(通鑑節要) 권(卷)4 한기(漢紀)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상제께서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8목(目)인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정심이하 평천하까지 5목을 취(取)하시고, 다음으로 위천하자불고가사를 제시하셨다. 대학의 8목은 사람이 닦아야 할 학문수양의 과정으로서 내적축덕(內的畜德)의 과정인 격물이하 4목과 외적 사회화 과정인 수신이하 4목을 차례로 열기(列記)하고 있다.
『전경』에 나오는 위 5목에 대한 보편적 해의(解義)는 마음을 바로 하고서야 몸을 닦을 수 있고, 몸을 닦은 후에야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린 다음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린 다음에야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선후(先後)단계의 순차적 논리로 설명한다. 이를 학계의 통설(通說)인 동시적 범주(範疇)로 해의하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음으로써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제께서는 평천하의 다음 문(關門)으로 위천하를 설시(說示)하고 있다. 이는 “내가 평천하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행록 3장 31절)”는 말씀과 합치된다.
그렇다면 상제께서는 왜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외용(外用)4목에다 내명(內明)의 근본인 정심을 첫머리로 제시하셨을까? 이는 수신의 척도(尺度)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正其心) 출발하기에 정심이 수신의 본(本) 바탕이 되므로 정심・수신을 우주의 근본이 됨과 동시에 인간수양의 씨줄과 날줄의 기초동량(基礎棟樑)으로 삼은 점이 다르다. 따라서 정심은 맹자의 존심(存心)을 아우르는 천지공사의 고귀한 정신인 일심을 담고 있다.
“이제 천하창생이 진명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교법 1장 1절)라는 말씀과 같이 천하사에 뜻을 둔 자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도(天道)를 성사시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 때 어느 틈에 가사를 떠올릴 겨를이 있겠는가를 촉한의 재상이었던 제갈량(181~234)의 성공하지 못한 고사를 들어 말씀하셨다.
“速手之地葛公謀計不能善事” 속수지지갈공모계불능선사 (공사 3장 39절)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교법 제2장 제52절).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 천하사를 위해 떠날 때 동생 균에게 당부하길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맡아 잘 간수하라 하고, 자신이 공명을 세우는 날 돌아올 것이라는 다짐을 하였다. 즉 천하사에 뜻을 두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보다는 박전십오경과 유상팔백주를 잘 가꾸게 하여 자기의 식솔들의 의식을 먼저 단속하였고,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여 백성을 살리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공명을 얻는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제갈량의 신(神)과 같은 재주와 계책으로도 능히 일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신명(神明)이 제갈량의 모사(謀事)에 응해 주지 않게 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어 천하사는 실패로 돌아갔다.(진수의 삼국지『촉서 제갈량전』참조).
이와 관련한 문언 구조를 살펴보면 위천하자의 위(爲)는 전치사로 대체로 ‘~ 위하여’ 혹은 ‘~ 때문에’라는 뜻을 지니나 여기서는 ‘~ 을 행하다’로 다스리다, 정치를 하다의 치(治)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천하(天下)는 목적어로 정치의 최고 경지를 뜻하고 자(者)는 의존명사로 ‘~ 하는 이(는)’로 사(事)의 의미를 지닌 도문소자를 일컫는다. 즉 위천하자는 후천의 정치를 담당하는 대사(大事)를 맡아 행하는 도문소자로 정의할 수 있다.
이어 ‘불고가사’에서 불(不)은 부정을 나타내는 허사로서 ‘아니다(非)’, ‘마라(禁止)’의 뜻보다 ‘없다’, ‘못하다’ 의 의미로 쓰이고 고(顧)는 머리혈(頁)과 새 이름 호(雇)로 이루어져 자형적 의미는 ‘머리를 돌려 돌아보다’여서 ‘돌아보다’, ‘살피다’의 뜻이나 ‘생각하다’, ‘마음에 두다’ 의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불고’는 ‘돌보지 마라’는 뜻 보다는 돌볼 겨를이 없다는 무(無)의 뜻에 더 가깝다. ‘가사(家事)’에서 가(家)는 건물(建物)이나, 주거(住居)의 명사적 요소로 쓰이나 넓게는 가족(남편・아내), 촌락(집성촌), 문벌의 의미까지 보태져서 가정의 일, 집안 일, 가문의 일 등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가사는 가족의 생계 등 안위(安慰)의 문제로 볼 수 있으나, 크게는 욕망, 재물, 탐욕의 뜻도 담고 있다. 따라서 불고가사의 사전적 의미는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다.’ 정도이나, 자구(字句) 해석의 틀에 갇혀 가정을 등한시하고 포기한다는 식의 풀이는 역(逆)으로 가사불고(家事不顧)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세설(世說)에 오르내리는 도만 닦으면 가사를 버리고 나몰라 한다든가, 가사와 생업을 팽개치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거꾸로 가족이 풍족하게 살아 갈 재산과 재물을 마련해 두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위천하자불고가사’는 천하의 일을 맡은 자는 개인의 가사에 치우칠 겨를이 없다. 즉 사적(私的)인 일에 얽매이거나 미치지 않는 무욕일심(無慾一心)의 마음가짐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지상천국건설을 과제로 천하사를 하려는 자는 가정의 일에 얽매이고 매달려서는 큰일을 이루지 못하므로 일심을 담아 일로매진(一路邁進)하라는 자경(自警)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위 사례를 통해 볼 때 수도인이 공적천무(公的天務)인 천하대사(天下大事)에 있어 선공무사(先公無私)의 정신을 망각하면 대의(大義)를 그르친다는 교훈이다.
반면 중국 경서(經書)에 나오는 우임금의 고사를 들어 ‘천하사를 도모(圖謀)하는 자는 모름지기 하우(夏禹)씨를 본받을 지니라’고 하신 말씀도 있다.
堯舜禹王一切同 요순우왕일체동(교운 2장 23절)
然二帝三王之治 本於道 二帝三王之道 本於心 得其心 則道與治 固可得而言矣
연이제삼왕지치 본어도 이제삼왕지도 본어심 득기심 즉도여치 고가득이언의
何哉 精一執中 堯舜禹相授之心法也 建中建極 商湯 周武 相傳之心法也
하재 정일집중 요순우상수지심법야 건중건극 상탕 주무 상전지심법야 (채침(蔡沈)의 『서전(書傳)』, 序文)
그리하여 2제(堯․舜) 3왕(禹・湯・武)의 다스림은 도(道)에 근본을 두고, 그 성인의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둔 것이니 바로 그 마음을 체득하면 도와 더불어 다스릴 수 있으므로 가히 견고한 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인간 본연의 천성품을 찾아 지키기 위한 일심의 문호인 정일(精一 ・ 세밀하고 한결 같은 순수한 마음)과 집중(執中・과부족이나 치우침이 없는 지극히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취하는 바른 예법)은 요(堯), 순(舜), 우(禹)가 주고받은 심법이요, 공명정대한 인륜의 규범을 세우기 위한 건중(建中: 중정(中正)의 도를 정함)과 건극(建極: 천자가 나라의 근본을 세워 천하를 다스림)은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성인의 심법을 닦은 군자만이 천하를 다스려 간다는 것이다.
순임금은 곤(鯤)의 아들이었던 우(禹)에 아버지의 못 다한 일을 맡기자, 구년치수사업(九年治水事業)을 하는 사이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三過其門 不入其門). 이로써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는 432년간 이어진 하(夏)나라를 창업함으로써 왕천하(王天下)하였다는 고사이다.
도문을 대명(大明)하게 하는 수도인 이라면 실패와 성공의 이 상반(相反)된 고사를 통하여 스스로 어느 쪽의 고사를 선택하여야 하는지는 자명(自明)한 이치이다. 물욕이 눈을 가린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말세를 당하여 상제님의 인연부름을 받고도 세속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안락(安樂)의 호의호식(好衣好食)에 유혹되고, 증권과 복권의 재욕(財慾)에 눈멀고, 부동산과 돈 벌이까지 이욕(利慾)에 현혹되어 좋은 집, 좋은 차, 번지르한 겉모습 치장에 황금 같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도문을 왕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진정한 불고가사자라 할 수 없다.
상제님께서 설(說)하신 ‘위천하자불고가사’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힘들고, 어렵고, 가난뱅이와 같이 고생만 하라는 그런 계율이 아니라, 상제님의 명(命・公事)을 잘 받드는 참 수도인의 마음가짐을 일깨워 주는 계명(誡命)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위천하자불고가사’의 상제님 공사 말씀은 심전(心田)을 잘 헤아려 보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노자의 『도덕경』제57장 순풍편에 “천하를 돕고 구함에 있어서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以無事取天下)”고 했고, 우리 속담에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다. 이에 일꾼 된 자는 성직(聖職)의 중요함을 자각(自覺)하여 후천선경을 앞당기는 일에 진심갈력(盡心竭力)함으로써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야 하겠다. 일심이 곧 정심이라, 일심을 가지면 하늘도 감동한다(一心通天)고 했다.
“수도를 잘하고 잘못함은 자의(自意)에 있으나, 운수를 받는 것은 사가 없고 공에 지극한(無私至公) 인도(人道)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이니,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私心)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대순지침』 93쪽
위의 말씀처럼 수도인 모두는 제갈량 같이 재주의 공명심과 가족의 안위를 우선함으로써 실패한 사례를 교훈의 디딤돌로 삼고, 하우씨처럼 구년치수사업(九年治水事業)에 사심 없이 공무에 일심으로 다함으로써 성공한 사례를 거울로 삼아 정심수도(正心修道)한다면 모두가 성공하는 길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므로 ‘위천하자불고가사’는 후천 5만년 운수의 천하사를 흔들림 없이 진행시켜야 하는 심법(心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심을 가지고 불고가사하며 위천하하는 도인들의 땀방울은 후천선경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