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이해(相互理解)
상호이해(相互理解)란 서로가 이치로 풀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 벽화는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다정한 표정으로 반가워하는 모습입니다. 서로가 사심(私心)을 가지고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다보면,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일어나 결국은 상호간에 척(慼)을 맺게 되어 서로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이치(理致)에 합당한가를 살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은 상대를 잘 이해시켜 양해를 구한다면, 서로가 좋은 사이로 서로를 도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상호이해는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에도 좋고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로 행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박성상제님께서도 항상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라고 여러 차례 훈시를 통해 강조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도인(修道人)을 약칭하여 도인(道人)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별 생각 없이 사용하지만, 도인이란 원래 완전한 수도가 된 사람을 지칭합니다. 즉 수도를 충분히 해서 도통군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인들 누구 하나도 귀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 왕가(王家)에서 왕의 자식을 대군(大君)이라 불렀습니다. 비록 왕자가 나이가 어리더라도 예를 다하여 대했습니다. 또 왕의 맏아들을 세자라 했는데, 왕도 어린 세자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장차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기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인들은 서로가 운수를 보고 가기 때문에, 상제님(上帝任)의 자손이라고 보면 됩니다. 상제님의 도인이지 내가 포덕을 했다고 내 도인이 아니며, 종속관계는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우주에서 제일 높은 상제님의 자식이고, 금싸라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박성상제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수도를 하는 과정입니다. 특히 임원들은 말 한마디 하는데 어렵고 몸 한번 움직이는 것도 어려울 때입니다. 이는 수반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원들이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였을 때, 수반들을 이해시킬 수 있고, 수반들로 하여금 임원들의 말을 믿고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상대도 나의 말을 이해하려 들 것입니다. 도인들 모두 상제님을 믿는 마음은 같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과 성격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임원들이 수반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은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제님께서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한 대 맞았을지라도 너희들은 그 사람의 손을 만져주면서 위로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이해시키려면 내가 먼저 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제님께서는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여야 되느니라.”(교법 제1장 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부 임원이나 선각들은 이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상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호이해는 요즘 회자(膾炙)되고 있는 소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상대를 배제하고 단순히 자신의 판단영역 하에서 혼자 이해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상호이해란 내 자신이 상대를, 동시에 상대가 나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므로, 상호이해는 소통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일방적인 이해(理解)단계에서 상호이해(相互理解) 단계로 발전해야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개는 자신이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했으니 상대도 이해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상호이해를 하기 전에는 단지 자신이 이해했다고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호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상대를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방적인 소통은 자신만을 소통의 주체로 삼지만, 진정한 소통은 자신과 상대 모두를 소통의 주체로 삼습니다. 일방적인 소통은 속성상 독선과 아집, 권위와 힘을 내세워 가시적(可視的)이든 불가시적(不可視的)이든 강압과 강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척(慼)을 발생시켜 상극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소통이 만연한 조직은 명령만 인정될 뿐,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의사교환은 묵살됩니다. 그러다 보니 조직원들은 명령에 잘 길들여져 복지부동하고 수동적이고 현실안주적(現實安住的)인 인간이 되어갑니다.
‘현실안주적’이란 부정적 현실에 안주하여 안이한 삶을 살거나 그러한 사고를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속에서는 발전이나 노력, 화합이나 상호이해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는 없고, 태만과 요령과 이기심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조직원이 현실안주적이면 조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책임은 조직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을 그런 성향으로 만든 리더에게 더 큽니다.
어떤 조직에서나 권위적인 상명하복식(上命下服式) 소통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리더는 단지 자신이 모든 것을 더 잘하고 권한이 있기 때문에, 지시하고 전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편견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리더가 진정한 소통을 위해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화합이 아닌 불화가, 발전이 아닌 퇴보가, 상생이 아닌 상극이 그 조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조직이 원활하게 소통되지 않으면, 리더 주변엔 옳고 그름을 기탄없이 바로 직언(直言)하는 사람은 없고,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로 속이거나 부추겨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 끌고 가려는 아첨꾼들만 득실거릴 것입니다. 아첨꾼들은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리더를 농락하지만, 오히려 그 어리석은 리더는 아첨꾼들을 감싸는 참담한 광경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상식과 원칙을 가지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전제로 진정한 소통을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한편 박성상제님께서 훈시 중에 “도인은 착하다고만 운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독함이 없이는 해원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나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운수 받는 마당에 참여를 한다는 마음과, 내가 포덕한 도인들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을 시킨다는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이해시키라는 의미입니다. 도인은 복종하는 자를 만들려 하지 말고, 순종하는 도인이 되도록 해야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종으로 키운 자는 간신이나 배신자가 될 수 있지만, 사랑으로 가르친 자는 생사(生死)를 같이 하며 충(忠)을 다하는 영원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독함’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니 독함이라는 것도 잊어선 아니 될 것입니다. 모든 도인들은 삼위 상제님의 자식과 같은 소중한 존재이므로,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서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여 수도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앞서 박성상제님의 훈시를 보면서 지금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연운에 따라 포덕한 도인들을 마치 자기가 운수를 주는 것 같이 착각하여 행동하는 임원이나 선각은 없는지, 있다면 지금이라도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있어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존재한다는 권위의식과 오만에 사로잡히는 순간, 난법난도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수도인들은 잠시라도 잊지 말고 자인자각하여 수도에 정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박성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가 존경하고 서로 돕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도통진경에 들어간다.”고 훈시하셨습니다. 포덕이란 상제님의 무상하신 덕화를 세상에 전해주는 것이며, 무상무변하신 위대한 소유주이심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도는 포덕이며, 포덕으로 운수를 받게 되고 모든 것이 포덕으로 이루어진다는 상제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상제님의 덕화를 세계만방에 펴는 큰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