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

                                                                                                                                                                                     
                                                                                                                                                                                                                   

  상제님께서는 중국이 편안해야 우리나라가 안정을 찾고 부흥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일을 신도(神道)로부터 바로잡고자 종도들의 판단을 들어 공사를 처결하셨다.

 

“() 순망즉치한(脣亡卽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 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일러 주셨도다.” (공사 제318)

 

이러한 중국 해원공사의 취지하에 상제님께서는 김일부를 청국명부에 앉히시고,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어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하시고 청도원 류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대신문을 열고 우리나라에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오는 공사를 행하셨다.(공사 제17, 26절 참조)

“()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 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셨도다.” (공사 제322)

 

  상제님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다. 만동묘의 만동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이다. 순자(荀子)』 「유좌편(宥坐篇)에 편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자공(子貢)이 황하를 바라보고 있는 공자에게 "군자가 물을 보고 느껴야 할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일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其萬折也必東)"라며 "이는 의지로다(似志)"라고 답했다. 중국의 지형이 서고동저(西高東低)인 까닭에 황하의 굴곡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강물은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 공자는 이를 사물의 필연적 이치로 비유했다. 모든 사물은 어떤 곡절이 있어도 그 나름의 발전 규칙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후 신하의 임금에 대한 충성, 꺾을 수 없는 군자의 의지나 절개라는 의미로 변용됐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 황제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을 일컫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청나라 광서제는 불과 4세에 청나라의 11대 황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황극신이 응기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장성한 후에는 혼란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충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추진하는 등 개혁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이미 그동안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유린해 온 서태후에게 밀려 궁궐 안의 중화전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1114일에 죽었다.

  그런데 광서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당대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죽었다. 따라서 이 일 역시 상제님의 공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후계자인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연호로 사용하고,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큰 의리를 지킨다는 송시열의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송시열은 1674(현종대왕 15) 화양동 중간계곡 암석 서편에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북경에서 구해온 의종황제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조각하고 이후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 1563~1620), 만력제의 묘호(廟號)] 및 의종[毅宗(1611~1644), 숭정제의 묘호(廟號)]의 묘를 세워 봉제(奉祭)할 계획을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가 죽을 때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을 내리게 된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1703년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이어 충북 괴산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 황실에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만동묘의 위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동묘의 제사는 화양서원에서 주관하였는데, 그 서원에서 아무 날 아무 시에 만동묘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제수전에 필요한 얼마를 당장 갖다 바쳐라.’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하면, 이유 불문하고 전답을 팔아서라도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여 무조건 대어야 했다. 화양묵패는 벼슬아치에게든 양반에게든 서민에게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발송되었고, 이에 불응하면 당장 끌려가 협박과 폭언을 듣고 매를 맞는 등 심한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서원의 행패야 심했던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횡포야말로 가장 극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출세하기 전 이곳저곳을 떠돌던 젊은 시절에 만동묘 화양서원을 지나다가 그곳의 유생들에게 잡혀 큰 봉변을 당했던 일이 있었고, 그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어 정권을 잡자마자 1865년에 만동묘에 모셔진 명 황실의 신위를 서울로 옮겨버리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아예 폐쇄시켜버렸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다시 복원시켰으나 일제는 1942년에 강제로 철거해버렸고, 그 후 한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갑오년 삼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 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듯 하니라. 다음날에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교운 제250)

 

  첨성대는 만동묘에서 10 여분 거리에 있다.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이 있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명 의종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현실의 청()나라는 오랑캐라며 배척하고, 망하고 없는 명()나라를 흠모하며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하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말인데 이는 존명대의(尊明大義) 하는 송시열의 글이다. ‘숭정황제어필 비례부동(崇禎皇帝御筆 非禮不動)’의 글은 명나라의 숭정제(의종)가 쓴 비례부동이라는 뜻이다.

비례부동의 글 옆에는 사각 형태의 석함이 있었다. 즉 석함 속에 옥조빙호 만력어필(玉藻氷壺 萬曆御筆)’의 글이 새겨진 판이 끼워져 있었고 석문(石門)으로 봉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석문이 깨여지면서 글의 판이 나온 것이다. 위의 사진은 옥조빙호를 새긴 그 석판이 나타나고 사라지기 전, 유학자이자 교육자인 우인규(禹仁圭, 1896~1967)라는 사람이 탁본한 것인데, 그 탁본사진은 2012년 김근수(괴산향토사연구회장)씨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탁본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 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가 새겨진 석판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만력어필 옥조빙호는 명나라 만력제가 쓴 옥조빙호라는 의미이다. '옥조빙호''옥조'는 임금의 면류관에 달았던 옥이고, '빙호'는 얼음을 넣는 항아리를 의미한다.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순결한 일심의 마음을 뜻한다. 이는 임금이나 군자가 지켜야 할 마음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암벽에 옥조빙호의 글은 볼 수 없고 석함의 흔적만 남아 있다.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에 빠져있다고 비판을 받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지난 날 명 황실의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기회가 생겼다.

상제님의 해원도수에 따라 만동묘를 기점으로 하여 황극신이 모셔짐에 따라 대중화가 되고 보은신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영화와 복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사는 단순히 중국의 해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망즉치한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이 제 위치를 찾아 편안해야 우리나라가 안정을 찾게 될 것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북아시아가 평화로워지면 세계 또한 화평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동묘에 행해진 공사의 의의는 지대하며 이러한 개개의 공사가 도수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질때 우리나라는 만국을 활계하고 문명이 크게 개화하여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