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강(雲岩江)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주(五呪)를 수련케 하시고 그들에게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종도들이 말하기를 「쓰기에 달렸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가라사대 「그렇다 할지라도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 용지불갈(用之不渴)하여야 하리라.」 종도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상제께서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가르치셨도다. 「이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雲岩江) 물은 김제 만경(金提萬頃)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 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셨도다. (공사 제1장 28절)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과 마령면 등에 충적지를 만들고, 임실군 운암면(雲岩面)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곡성읍 북쪽에서 남원시를 지나 흘러드는 요천과 합류한 후 남동으로 흐르다가 압록 근처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 그 이후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 · 전남의 도경계를 이루면서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212.3km. 유역면적 4,896.5 ㎢인 강이다. 그 중 운암면 앞을 흐르는 섬진강 상류의 물을 운암강(雲岩江)이라고 한다. 섬진강 유역의 연평균 강우량은 1,408.3㎜이고 이 중 67%가 우기인 6월과 9월의 4개월 동안에 집중되어 내린다.

김제 만경 들판에는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있다. 김제평야는 동진강 유역에 있고, 만경 평야는 만경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 이 둘을 합쳐 김제만경평야 또는 호남평야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또한 김제만경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신 1907년 12월만 하더라도 김제만경평야는 가뭄이 들면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천수답(天水畓)이 대부분 이었다. 천수답은 모내기철에 충분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가 늦어지고, 모를 낸 후에도 가뭄에 의한 피해가 있기 때문에 안정된 수확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전라북도 지역은 전통적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이지만, 물줄기가 약한 동진강 유역은 수량이 부족한 관계로 오히려 농사를 짓기에 불리한 지형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동진강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주요 하천인 만경강과 원평천, 고부천, 신평천 등은 금강과는 달리 물줄기가 가늘어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예부터 벽골제, 눌제, 만석보 등의 수리시설을 설치했던 것은 그와 같은 지리적 조건에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상제님께서는 용지불갈(用之不渴) 즉, 아무리 써도 닳거나 말라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천수답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상제님께서는 천수답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하셨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수리시설을 통해 농업용수가 공급되는 수리답(水利畓)이 일반적이지 않은 때라 종도들은 상제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의 논면적 중에서 천수답의 비율은 18.7%나 되는 실정이다. 수리답의 비중이 천수답보다 높아지게 되는 건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고 나서 부터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교역의 축소와 식량수요의 증대를 가져왔고, 물가의 앙등(昂騰)은 일본 내에서도 쌀값의 상승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공업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정책은 저곡가정책을 요구함으로써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의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의 중점은 수리(水利)의 확보에 있었다. 이러한 계획의 실시는 한국농민의 토지상실과 일본인 및 대지주의 토지집중을 촉진하여 한국농민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전북지역의 일본인 농장 소유면적은 전북지역 총경지면적의 43%에 달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동진강 상류에 저수지를 축조한다 하여도 겨우 5억 내지 6억 입방척(立方尺)의 수량을 확보하는데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수량으로는 도저히 1만 4천여 정보의 평야를 관개할 수 없다는 수리기술상의 판단을 내리고 항공답사를 감행하였다. 조사결과를 종합하여 결국 동진평야와는 아예 유역을 달리하는 섬진강을 수원(水源)으로 정하고 이곳에 저수지 축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1909년에 동진강 유역의 일본인 지주들이 동진수리조합의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통감부의 인가를 얻지 못해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24년 큰 가뭄을 맞게 되면서 수리조합 설립의 문제가 다시 부상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은 1925년 7월 9일 총독부에 설치 인가를 신청하였고, 한달 여 뒤인 8월 19일 동진수리조합 설치인가를 받게 되었다.

1925년 11월 동진수리조합에서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운암제를 착공하였다. 1926년 2월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까지를 뚫는 운암터널 공사를 시작하였다. 1927년 5월 운암터널이 완공되었고, 12월에 운암제가 완공되었다. 또한 물을 농경지로 보내는 수로건설과 농경지를 늘리기 위한 개간사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운암제는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에 건설된 곡선형 콘트리트 중력식 댐이다. 취수구를 운암면 운정리에 설치하여, 이곳에서 취수된 물을 산을 뚫어서 만든 운암터널(길이 759m)을 통해 산 반대편인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 팽나무정 마을을 통해 동진강 상류로 방류된다.

이후 1965년 12월에 섬진강댐 다목적댐이 준공 되면서, 운암제는 수몰되었다. 섬진강 다목적댐은 운암제의 2.4km 하류에 건설되었으며, 높이 64m, 길이 344m, 총저수량은 운암제의 7배인 466백만㎥이다.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로 운암강은 거대한 인공호수인 옥정호(玉井湖)가 만들어졌다. 취수지를 산내면 능교2리 용암부락에 설치하고 직경 3.4m, 길이 6km의 터널을 해발고도 60m 지점에 뚫어 섬진강수력발전소(칠보면 시산리 210번지)로 물을 보내고 있다. 옥정호의 표고가 200m이고, 칠보수력발전소의 높이가 50m이다. 이 낙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3억 5천만톤/년) 농업용수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한 줄기는 팽나무정에서 방류되어 동진강에 더해지고, 다른 한 줄기는 계화도 청화 저수지 까지 연결된 동진강 도수로에 들어간다. 노령산맥 허리를 뚫어 물길을 나눠준 섬진강 덕분에, 동진강이 제 구실을 하고 호남평야의 남단이 늘 촉촉함을 잃지 않게 된 것이다.

 

상제님께서 이 공사를 보신 곳은 운산(雲山)으로, 이곳에는 신경수 종도가 살고 있었다. 운산은 현재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에 속해 있다. 운산의 근처에는 동진강이 흐르고 있고, 낙양취입수문이 위치해 있다.

본래 운암강은 섬진강의 상류로 김제만경평야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상제님의 공사를 통해 이어지게 되니, 이것이 천지공사이다. 상제님께서는 1907년 12월 공사를 보셨고, 이것이 현실화 된 것은 1927년 12월이다. 천지공사의 설계에서 시공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이 제나라 한 고을의 흉년을 없앴다고 하시며, 나는 전북 칠읍에 흉년을 없애리라고 하셨다. 강태공은 제나라 한 고을에 불과하지만 상제님의 공사는 7개의 읍보다 더 넓은 곳에 영향을 미쳤다. 전라북도 평야지대의 대부분이 상제님의 공사 덕분에 안정적으로 쌀을 생산하고 있다. 인접해 있는 전남의 천수답 비율이 26.8%인데 비해, 전북은 13.1%에 불과하다. 이 수치를 통해서도 얼마나 안정적인지 알 수가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쌀 생산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쌀 생산량이 386만8000톤이고, 전북은 62만 7000톤으로 16%에 이른다.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에 비유하여 전북 7읍이라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전북의 평야 전역에 나아가서는 전국에 영향을 미친 공사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당시의 이야기를 담아낸 조정래의 『아리랑』이라는 소설이 있다. 전국 최대의 곡창(穀倉) 이었던 김제만경평야를 배경으로 일제의 수탈과 강제 징용, 소작쟁의, 독립운동 등 구한말부터 해방기까지의 역사와 농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민초들의 한과 눈물을 기록한 아리랑을 읽다 보면 너무 속이 상하고, 부아가 치민다.

1990년대 초반, 한 외국 언론인이 조정래 작가에게 질문을 했다.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것인가? 이제는 잊어버릴 때도 되었지 않았나!” 이에 대한 조정래 작가의 답변은 단호했다. “사죄하지 않는 민족에게 용서란 없다.”

병마개로 쓰인 종이에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이 적혀있었다고 하였다. 병을 막는 종이에 쓰인 글자가 뜻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하다. 병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길한 꽃도 열매를 맺고, 흉한 꽃도 열매를 맺는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악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惡之家 必有餘殃) 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람을 비롯해서 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하늘의 그물이 성긴 것 같아도, 빠트리는 것은 없다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제는 왜 그리도 잔혹하게 수탈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전경에서 찾아보자. 상제님께서는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 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 자를 너희들에게 붙여 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하셨다.

어질 인(仁) 그것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결과는 천지차이이다. 만약 상제님께서 인(仁)을 일본에게 붙여주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일본의 식민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고 하셨다. 진정한 어짐은 철을 알고, 철에 맞는 행동을 통하여 자생하는 모든 생명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때 그 어짐은 덕(德)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인(仁)자를 잘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