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반구정(咸安 伴鷗亭)

  

  낙동강과 정암강이 합류하는 도흥진(道興津) 옆에는 암벽이 층층을 이루고 뒤에는 용화산(龍華山)이 좌우로 감싸 안아 천하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반구정(伴鷗亭)이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앞마당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세월의 여파로 초라해진 정사와 달리 해마다 그 위용을 뽐내고 마당 왼편 언덕으로는 높이를 가늠키 어려운 감나무 가지가지마다 붉은 감들이 매달려 주인을 기다린다. 절벽 아래로는 새파란 낙동강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넓은 평야위로 곡식들이 움을 돋우고 있다.

 

  한때 시서(詩書)를 즐기고 경을 담론하는 소리가 들렸을 법한 이곳은 어느새 인적이 끊긴지 오래이다. 도주님의 13대조 휘(諱)는 방(垹), 호(號)는 두암공(斗巖公)께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郭再祐) 장군 등과 정암나루를 지켰다. 이는 군북면 월촌리와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사이에 있는데 강 가운데 바위가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솥 위에 겹겹이 쌓인 바위와 같다고 정암(鼎巖)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곳은 부산, 마산 방면에서 진주 방면으로 가는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들이 진주를 통과하여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하였다. 왜군 선봉이 정암진에서 강을 건너기 위하여 마른 땅에 미리 설치한 말뚝을 의병이 뽑아 진창으로 몰래 옮겨 놓고 다음날 말뚝을 따라 강을 건너던 적이 갈팡질팡 하는 것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두암공은 정유재란 때에는 창녕 화왕산(火旺山) 산성 의진(義陳)에서 의거하여 전공을 세우셨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각 우포(藕浦)의 말 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서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공은 충효사상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으니 『부모에게는 섬김으로 효도를 다하였고, 나라를 위해 또한 충성을 다하였노라』라는 자작시를 벽에 붙이고 지냈다고 전한다. 두암공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생육신 조려(趙旅)의 현손이다. 이칭(李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박제인(朴齊仁), 이길(李佶)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깊이 연구하여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조목(趙穆), 유운룡(柳雲龍), 정경세(鄭經世), 박성(朴惺)등과 교유를 맺고 도학(道學)에 힘썼다.​1)

 

  본래 반구정은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창녕 낙동대교 부근의 말바위(두암 : 斗巖)에 지어졌다고 한다. 낙동강변 말바위에 있던 반구정은 침식되어 1858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 위치인 용화산 중턱 (옛 청송사(靑松寺) 자리)으로 옮겨 졌다고 한다. 현재 반구정의 옛터에는 반구정 유허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르고 비신(碑身)에는 두암조선생반구정(斗巖趙先生伴鷗亭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세월이 흘러 반구정이 침식되어 용화산에 있는 조방 선생의 조카 간송 조임도의 합강정 오른편의 옛 청송사 터에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도주님의 반구정에서의 공부를 전경을 통해 살펴보자.

 

  도주께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교운 제2장 20절)

 

  재실은 통사동 재실을 의미한다. 지난 11호 회보에 통사동 재실에 대하여 쓴 글을 살펴보자.

  전북 김제군 금산면 원평에서 국도 1호선을 따라가다 용호리(龍湖里)를 지나 솟튼재를 넘으면 통사동(通士洞)이 보인다. 통사동 재실은 현재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에 있다. 통사 마을은 조선시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나왔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통사동 재실은 도주님이 머무시던 당시에는 통석리였지만 통사마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통사동 재실’이라고 불렸다.

  마을을 거슬러 올라 복지시설인 만복원 앞마을을 지나면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재실 터만 보인다. 가는 길에 나무와 잡풀이 자라있고 왼쪽은 대나무 밭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관리인이 있어서 건물보존과 유지가 잘 되었으나 관리인이 떠나고 난 뒤에는 퇴락하였다. 앞에 있는 논밭도 농사를 짓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재실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 지금은 세월의 풍파에 재실도 허물어져 건물잔해와 기와가 흙더미에 쌓여 있다.

  통사동 재실은 자료에 의하면 187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재실 상량문에 ‘1876년 3월 16일(음력)에 상량했다’고 적혀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었고, 도주님 공부하실 때는 지어진지 50년 가까이 된 때가 된다.

 

  좌우의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이 재실에서는 원래 통사동에 살았던 이준세의 재실이었지만 도주님께서 도수를 보신 곳이다. 그리고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치성을 올렸으며 상제님께서 남기신 둔궤를 비치하시어 공부를 하셨던 매우 중요한 재실이다.​2)

1920년에 사라진 둔궤는 한갑자(60년)가 훌쩍 지난, 1984년(갑자년)에 도전님께서 논산에서 둔궤를 찾아 중곡도장으로 모셔왔다. 도전님께서는 둔궤를 성궤로 이름을 바꾸시고 치성을 모셨다고 한다.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 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교운 제2장 30절)

 

  밀양 종남산 영성정은 종남산의 7부 능선쯤에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도주님께서는 1924년 4월에 무극도장 터를 마련하시고 치성을 올리신 후, 폐백도수에 따른 공부를 다섯 달 동안 행하기 위해 영성정에서 공부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영성정에서 시작된 폐백도수를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서 마치시게 된다.

  폐백은 보통 예물을 의미하는데, 임금에게 바치거나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물건. 또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폐백도수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을 뜻한다. 따라서 이 도수는 상제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도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3)

  도주님께서 폐백도수를 보시면서 영성정에서 반구정으로 옮기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뜻을 알기는 어렵지만, 유추해보자면 반구정이 위치한 용화산(龍華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중성의 천지개벽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나의 세상은 천지(天地)가 성공하는 때라. 선(善)과 악(惡)이 판단되고, 화(禍)와 복(福)이 판단되고, 생(生)과 사(死)가 판단 되느니라. 나는 천지(天地)를 개벽(開闢)하여 후천(後天)의 운수를 열어서 오만년 동안 무궁한 선경세계(仙境世界)를 만드나니 곧 용화세계(龍華世界)요. 상생대도(相生大道)가 곧 나의 도(道)니라.​4)

 

  용화(龍華)는 미륵불의 세상. 즉 후천선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원신(解冤神)으로 오신 상제님과 보은신(報恩神)으로 오신 도주님의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진리로 후천선경 세상이 하루빨리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어느덧 도주님께서 도전님께 종통을 전하시고 화천하신지 60년이 지났다. 선천 상극세상과 후천 상생세상의 사이에서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 후천선경에 어울리는 덕(德)과 복(福)을 얼마나 쌓았을까? 덕이 없는 곳에 후천이라는 꽃은 피지 않는다.

  상제님께서는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5)고 하셨다. 전명숙을 롤모델로 삼아 남을 잘되게 하는 일에 힘써 나아간다면 용화선경(龍華仙境)도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구정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저 멀리 남지철교가 보인다. 『채지가』에 나오는 뱃노래와 대강철교로 글의 끝맺음을 지으려 한다.

   

 

지동지서 한단말까 난법난도 하던사람

전 공 은 고사하고 천위신벌 없을소냐

탄탄대로 어디두고 천방지축 무삼일고

의심말고 따라서라 등 들 고 불밝혔네

어주자를 다시만나 무릉도원 찾아가니

남해남지 지 남 지 대강철교 높았구나

(뱃노래 中)


청운녹수 낙수교는 과거선비 걷는다리

우리다리 어디있노 대강철교 바라보니

이다리는 뉘다린고 정산도의 놋다리라

놋다리는 무쇠다리 튼튼하고 튼튼하다

형님형님 사촌형님 손길잡고 올라가세

이다리는 뉘가놨노 부처님의 도술인가

(남강철교 中)


     

1)『대순회보 57호』「지명 이야기」 : 함안 반구정(伴鷗亭)

2)『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1호, 「전경속의 지명」, 통사동 재실

3) 『대순회보 15호』논단 : 교운(敎運) 2장(章) 연구(硏究)

4) 이중성,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 p.35 曰我世 天地成功之世니 善惡이 判斷하고 禍福이 判斷하고 生死가 判斷也니라 我曰 開闢天地하야 開后天地運하고 作五萬年 無量仙境하나니 龍華世界오 相生大道-是-    我道也니라

5) 교법 제1장 2절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