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회문산(淳昌 回文山)

         

회문산은 순창군과 임실군의 경계를 이루며 임실군 덕치면 서쪽에 길게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산은 해발 774m의 높은 산으로 둘레는 수백 정보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임실군 강진면, 서쪽으로는 순창군 구림면에 연결돼 있다. 주위에는 ‘일중리, 회문리, 회진리, 안정리’ 등 여러 부락이 둘러싸고 있으며 예로부터 명당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또한 이 산의 북쪽에는 투구모양 같이 생긴 ‘투구봉’이 있고 남쪽으로는 고려말 이태조(李太祖)의 등극을 위해 무학대사가 만일(萬日)을 기도하였다는 ‘만일사(萬日寺)’가 있다. 풍수사들의 말에 의하면 회문산 주봉(主峰)의 형태는 ‘탐랑승마격(貪狼乘馬格)’ 이며 중심으로 잠락(潛落)한 한줄기의 서기(瑞氣)는 천하대지(天下大地)를 맺어 ‘상제봉조(上帝奉詔)’​1)를 이루었는데 비결서에는 빠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산 동쪽 산록(山麓)에 대혈(大穴)이 하나 맺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2)이다.

 

회문산을 오르다보면 유난히 많은 무덤을 볼 수가 있다. 무덤 하나 없는 산이 어디있겠냐마는 회문산은 좀 특별하다. 한 때 3,000여기에 달하던 무덤이 현재는 300기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홍성문 대사​3)가 입산도통하여 ‘회문산가 24혈’을 지었고, 오선위기 자리에 묘를 쓰면 59대 동안 발복하는 명당이 회문산에 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회문산으로 들어가는 시신은 있어도 회문산을 나가는 시신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회문산가는 회문산의 명혈을 후세인에게 전하고자하는 마음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이곳의 혈지는 속안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적선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현세 사람들에 대한 질책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회문산가는 단순히 풍수이론을 가지고 회문산의 혈지를 묘사하여 속인에게 알리기 위해서만 유통된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품성을 올바로 깨달아 사욕에 의지하여 부모나 조상의 묘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인간의 바른 도리를 깨달아 실천하면 하늘이 혈처를 점지해 준다는 대중교화를 목적으로 한 작가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가사라고 할 수 있다.​4)

홍성문 대사는 전경에도 등장한다. 상제님께서 김보경의 집에서 백지에 27년이라고 쓰시자 종도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상제님께서는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5)

27년 동안의 헛도수는 천자의 꿈을 꾸던 차경석이 동학해원공사를 맡도록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공사이다. 이에 따라 차경석은 차천자로 불리며 많은 권세를 누렸고, 차경석의 보천교는 한때 600만 신도를 자랑했었다. 하지만 1936년 차경석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였고, 보천교의 건물은 뜯겨져 사라졌다. 헛된 일이 된 것이다.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회문산에 二十四혈이 있고 그 중에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 있고 기변(碁變)은 당요(唐堯)가 창작하여 단주를 가르친 것이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대운이 열려 돌아날지니라.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네 명당은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6)과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7)과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8)과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이니라. 그리고 부안 변산에 二十四혈이 있으니 이것은 회문산의 혈수의 상대가 되며 해변에 있어 해왕(海王)의 도수에 응하느니라. 회문산은 산군(山君), 변산은 해왕(海王)이니라」 하시고 상제께서 그 정기를 뽑으셨도다. (공사 제3장 6절)

 

단주(丹朱)는 요(堯)임금의 아들로, 상제님께서는 원(寃)의 시작을 단주로 보시고 단주에 대한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년 동안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고 하시며 단주에 대한 해원공사를 보셨다. 우리는 ‘단주가 품은 원은 무엇 이었기에 상제님께서 원(寃)의 시작을 단주로 보셨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존에는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단주가 왕이 되지 못했던 것이 단주가 품었던 원의 실체라는 해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최동희는 『해원상생과 우리 일상 언어』(2009)에서 요임금 시절에는 부족연합체였기 때문에 단주가 요임금의 아들이라고 해서 당연히 왕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군주세습제는 우(禹)임금의 하(夏)나라부터 시작되었다.​9)

또한 정재서는 『선양인가? 찬탈인가?-고대 중국의 왕권신화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2009)에서 요-순-우의 선향신화를 유가를 선전하기 위해 정교하게 조직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을 통하여 순이 요를 유폐했을 뿐 아니라 단주까지 연금시켜 요-단주 부자간의 정리(情理)마저 끊어 놓았다고 하였다. 또한, 요국(堯國)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산서(山西) 양분(襄汾)의 도사(陶寺) 유적이 파괴된 성채 ․ 궁전 및 종묘, 도굴당한 왕릉, 살해된 장정, 음행을 당한 부녀의 유체 등 철저히 훼멸된 상태로 발굴됨으로써 요국은 최후에 엄청난 폭력에 직면했음을 보여줌으로 요-순 선양이 허구임을 주장하며, 실상은 요-단주 간 세습관계를 파괴한 찬탈이었음을 주장하였다.​10)

 

전경에는 없지만 상제님께서 단주에 대해 평가하신 글을 『천지개벽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단주가 반만년동안 불초하다는 말을 들어왔으나, 실제로는 조정의 신하들이 왕으로 추천 할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하셨다. 또한 단주는 여러 사람과 즐거움을 나누고, 대동세계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하였고, 상제님께서는 요순의 세상을 단주가 다스렸다면 오랑캐의 구분이 없고 천하가 한 집안이 되었을거라 칭찬하셨다.​11)

 

또 상제께서 장근으로 하여금 식혜 한 동이를 빚게 하고 이날 밤 초경에 식혜를 큰 그릇에 담아서 인경 밑에 놓으신 후에 「바둑의 시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를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 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공사 제2장 3절)

 

상제님께서는 바둑의 시조 단주의 해원도수를 회문산 오선위기혈에 붙여서 조선국운을 돌리셨다. 오선위기는 다섯 신선이 모여 바둑을 두는 형국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12)에 주인 신선을 더한 것이다. 두 신선은 바둑을 두고, 두 신선은 각각 훈수를 두고, 주인신선은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대접만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상제님께서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오선위기에 붙이셨다. 그렇기에 바둑을 두는 네 명의 신선은 조선을 둘러싼 4대 강국으로 풀이하면, 바둑을 두는 두 신선은 미국과 중국이고, 훈수를 두는 신선은 일본과 러시아이다. 현재 국제정세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구도를 이루지만, 주인 신선인 우리나라는 다만 대접만 소흘히 하지 않으면 주인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오선위기 공사에서 날짜가 길어지도록 승부가 결정나지 않아, 최수운을 증인으로 삼아 승부를 결정한다고 하셨다. 그런 연유로 최수운을 초혼하여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에 장사하노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四월 어느 날 김 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귀마다 「천곡(泉谷)」​13)이라 쓰시기에 그 뜻을 치복이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옛날에 절사한 원의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치복과 송환으로 하여금 글을 쓴 종이를 마주 잡게 하고 「그 모양이 상여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갑칠은 상제의 말씀이 계셔서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서 서편 하늘에 한 점의 구름이 있는 것을 아뢰니 다시 명하시기에 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들어와서 한 점의 구름이 온 하늘을 덮은 것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 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리니 六월 十五일 신농씨(神農氏)의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행하리라. 금년이 천지의 한문(捍門)이라.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니라」 하셨도다. (행록 제 5장 15절)

 

궁을가에는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또 났구나. 사명당이 갱생하여 승평세월(昇平歲月) 불원(不遠)이라’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사명당 갱생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사명대사 유정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명당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상제님께서는 부모산인 전주 모악산과 순창 회문산의 정기를 뽑으시고, 순창 회문산의 오선위기혈 ․ 무안 승달산의 호승예불형 ․ 장성 손룡의 선녀직금혈 ․ 태인 배례밭의 군신봉조혈인 네 명당의 정기를 종합하신 후 회문산 24혈과 부안 변산의 24혈을 산군(山君)과 해왕(海王)으로 서로 대응케 하여 강산의 정기를 하나로 합치는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는 이 공사를 마치시고 고래의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고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셨다. 이 두 가지는 얼핏 보면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명당 갱생 공사가 강산의 정기를 하나로 합쳐서 후천의 운을 여는 공사라고 본다면,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고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신 건 후천의 운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강압과 위무로 남을 다스리는 선천 상극시대와 달리 후천은 상호 존중하고 공경하는 도의 바른 기운에 의하여 조화가 이루어지는 상생시대이기 때문이다.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서로 이기려고 다투는 선천 상극운이 물러가고, 모두가 화합하여 천하가 한집안이 되는 후천 선경세상이 하루 속히 실현되어, 단주의 원이 풀리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지존시대(地尊時代)에서 인존시대(人尊時代)로의 전환점에 서있는 지금, 상제님 공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과거, 현재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이 죽을 때에 잘 살고, 남이 잘 살 때에 영화와 복록을 누리는 비결은 상제님 공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1)도선국사 원저․정관도 해설, 『도선국사 풍수문답』, 지선당(1994) p.314

 

 2) 『대순회보 25호』전경속의 옛땅을 찾아서 : 회문산 오선위기혈 p.7

 3) 홍성문은 전라도에 살았던 술객으로, 그의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250여년 전 임실군 운암면 턱골에서 홍진사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모친이 주막집 주모인 관계로 그는 평생 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자 홍진사는 그를 거두어 몸종처럼 키웠는데, 홍진사 마저 죽자 맏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셋째 형은 홍성문을 창피하게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홍성문은 이를 피하여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고 회문산에서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풍수에 대해 아주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평생 양반을 조롱하면서 지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4) 김보근, 「<회문산가>에 나타난 풍수이론과 그 문학적 변용의 양상」,『한민족문화연구』15, 2004. p.113

 5) 예시 1장 53절

6) 7)8)

9) 최동희, 「해원상생과 우리 일상언어」『대순진리학술논총』4(2009) p.58~65

10) 정재서, 「선양인가? 찬탈인가?-고대 중국의 왕권신화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중국어문학』제54호(2009) p.11~14

11) 이중성, 『천지개벽경』, 한빛(1992) p.101~103

12)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포악무도한 정치를 하자 뜻있는 선비들은 세상을 등지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 시절 섬서성 상현(商顯) 동쪽에 산상의 깊은 산중에 네 사람의 은사가 난리를 피해 숨어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 하황공(夏黃公)이다. 그들은 세상의 근심걱정을 잊기 위해 약초를 캐고 바둑 두는 것으로 소일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 : 상산에 사는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 네 명)라고 하였다.

13) 천곡 송상현(泉谷 宋象賢). 자는 덕구(德九).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현감 복흥(復興)의 아들로 10세 때 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하였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正郞)에 이어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당시 일본과 명(明)나라는 사이가 악화되어 전쟁 직전이었으므로 동래(東萊)는 군사적 요지로서 사람들은 죽음의 땅이라고 하여 부임하기를 꺼리었다. 상현은 간악한 무리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터이므로 전쟁 직전인 1591년(선조 24) 겉으로는 영전 같지만 실은 좌천되어 동래 부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목패(木牌)를 세우자 동래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글을 목패에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이에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당하자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충북일보, 2017-11-29, 충북지명산책-새미실과 송상현]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