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淳昌) 농바위(籠巖)

(전북 순창군 쌍치면 종암길 21-12)

    

 

동네 이름을 비롯한 지명에는 전설과 설화가 얽혀 있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지역의 이야기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중에 농바위라는 곳이 있다. 농바위는 바위가 장롱처럼 네모반듯한 모양이거나 반닫이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바위는 경기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불곡산 자락에도 있고, 경남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에도, 그리고 전남 순창군 북흥면 종암리에도 있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구 평창동에도 농바윗골이 있다. 대표적인 농바위 전설은 어느 날 힘센 장사가 나와 그 큰 바위를 열고 속에 숨겨둔 무기로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농바위가 우리 수도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제님께서 순창(淳昌)의 농바위(籠巖, 농암)에서 중요한 공사를 보셨기 때문이다. 전국에 농바위는 수십여 곳에 있는데 왜 순창의 농바위에서 공사를 보셨을까?

순창(淳昌)은 이명(異名)이 오산(烏山) 또는 옥천(玉川)이며 본래 백제 때 도실군(道實郡)이던 것을 신라 경덕왕시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쳐 불렀다. 그리고 고려조에 와서 지금의 이름인 순창현(淳昌縣)으로 하여 남원부에 복속 시켰으며 충숙왕 원년 이 고장 출신 승려 정오(丁午)가 국통(國統)이 되었기 때문에 순창이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순창은 산수가 아름답고 명당(明堂)이 많아 예로부터 호남의 승지로 알려져 왔다. 순창은 구한말(舊韓末)

을사조약(1905년)이 체결된 후 최익현(1833~1906)이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체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 그의 휘하에 있던 이 지방 출신 의병장 양춘영(楊春永)은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근거를 두고 일본의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일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상제님께서는 순창(淳昌)에서 많은 공사(公事)를 보셨다. 그 중 오선위기(五仙圍碁) 공사가 대표적이다.

 

또 상제께서 장근으로 하여금 식혜 한 동이를 빚게 하고 이날 밤 초경에 식혜를 큰 그릇에 담아서 인경 밑에 놓으신 후에 「바둑의 시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를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공사 제2장 3절)

 

상제님께서는 박장근 종도로 하여금 식혜를 빚게 하여 오선위기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의 집에서 공사를 보시면, 자연스레 그 집의 주인이 공사의 시중을 맡게 되었다. 오선위기 공사의 시중은 박장근 종도가 맡았고, 이를 통해서 오선위기 공사는 박장근 종도가 살았던 순창 농바위에서 보셨다는 것을 유추할 수가 있다. 오선위기혈이 있는 회문산은 농바위에서 불과 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순창 농바위의 공사가 오선위기 공사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창 농바위는 원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의 농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농바우 또는 농암(籠巖)이라 불렀다. 현재는 전북 순창군 북흥면 종암리 농암마을의 조일섭씨 집(전북 순창군 쌍치면 종암길 21-12),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농바위 안에 하늘이 신검과 갑옷을 숨겨놓았는데 장군이 나면 내여가리라는 전설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원래는 하나의 큰 바위였는데, 어느날 벼락을 맞아서 현재는 두 개의 바위로 나뉘어져 있다.

 

상제님께서는 1907년(丁未年) 10월 차경석을 데리고 농바위 박장근의 집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 박장근의 머슴에게 어젯밤에 무엇을 본 일이 있냐고 물으셨다. 머슴은 “어젯밤 꿈에 한 노인이 농바위를 열고 갑주와 장검을 내어주며 주인을 찾아 전하라 하므로 이 방에 두었는데 차경석이 앉은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너가 꿈을 제대로 꾸었도다.”라고 하시며,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내가 풀어 쓰리라. 전명숙과 최익현이 있었으되 그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공사 제1장 27절)

순창 농바위의 큰 기운은 백의한사로 일어나 천하에 난을 동케한 전명숙과 최익현조차 그 기운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아니므로 쓸 수 없다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전명숙은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여 순창 피노리에서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고, 최익현은 을사조약(1905년) 체결에 반대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순창에서 체포되고 만다.

그렇다면 차경석이 그 기운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 차경석의 보천교는 600만 신도로 조선의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끝내 상제님의 믿음을 저버리고, 보천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 된다. 차경석 그 역시도 농바위의 기운을 쓸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농바위에 묻혀 있는 큰 기운을 직접 풀어 쓰신다고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허미수(許眉叟)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이천 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고 하시며 세 명의 종도들에게 일만이천 장의 모실 시(侍) 자를 써서 벽에 붙이고 칠성경 三七편을 암송하게 하셨다. 그 후에 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일만이천의 시(侍)란 글자에 바르셨다.

『대순전경』초판에는 그 글자모양이 아라사 병정과 같다하시며, 아라사 군대가 내 군대라고 하셨다. 이 공사가 정확히 어떤 공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실 시(侍)자를 써서 일만이천의 도통군자를 모셔오는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칠성경을 염송하라 하셨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상제님께서는 순창 농암의 큰 기운을 풀어서, 일만이천의 도통군자를 출세하는 공사를 보신게 아닐까 생각된다. 명나라 때의 주장춘은『진인도통연계』라는 책을 통해 금강산의 지맥을 통해 1만2천의 도통군자가 출세한다고 예언한바 있다.

 

곤륜산제사지맥(崑崙山第四枝脈)이 입우동해(入于東海)하여 생백두산(生白頭山)하고 백두산(白頭山)이 생금강산(生金剛山)하여 기맥일만이천봉(起脈一萬二千峯)하니 생증산(生甑山)하여 천지문호모악산(天地門戶母嶽山)하에 도출어오야(道出於熬也)라. 고(故)로 일만이천도통야(一萬二千名道通也)라.

 

곤륜산의 제4맥이 동방으로 쭉 뻗어 백두산에 맺히고 그 맥이 다시 남으로 뻗어 금강산을 수놓아 1만2천봉이 솟았느니라. 그리하여 이 기운을 타고 증산(甑山)께서 오시니 이 분이 천지의 문호인 모악산 아래에서 추수의 진리를 열어 주시니, 후에 금강산의 정기에 응하여 1만2천의 도통군자가 출세하리라.

 

큰 명당은 하늘에서 쓰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개인이 묘나 집을 쓴다고 해도 그 기운을 쓸 수 없다고 한다. 농바위의 전설처럼 농바위의 숨겨둔 무기로 세상을 구할 일만이천 도통군자가 하루라도 빨리 출세하기를 바래본다.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 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공사 제2장 4절) 또한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 라고 하셨다. (예시 28절)

상제님께서는 이미 백여년 전에 천지공사를 통해 조선국의 운수를 정하시고, 일만이천 도통군자의 출현을 결정하셨다. 수도의 목적은 도통이라 하였듯이, 항상 남을 잘되게 하는 것을 잊지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정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통이라는 큰 결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