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불산 수리사(見佛山 修理寺)

(경기도 군포시 속달로 347-181 수리사)

        

수리산은 경기도 안산시와 안양시의 경계를 이루며, 군포시를 가로지르는 높이 475m의 산이다. 지금은 수리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태을산, 견불산 등으로 불렀다. 수리산을 경계로 조선시대의 안산현과 과천현이 나누어졌다. 안산에서는 수리산 또는 견불산이라 하였고, 과천에서는 태을산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00년대를 전후하여 같은 산줄기의 연봉에 대한 지명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 산군을 하나의 이름인 수리산으로 묶어서 부르고, 수리산 연봉 중 최고봉은 관행대로 태을봉이라고 불러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수리산의 수리(修理)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수리산의 빼어난 산봉우리가 마치 독수리 같아 수리산이라 하는 설이 있고, 조선시대 어느 왕족이 수도를 하였다하여 수이산(修李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신라 진흥왕 때에 수리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옛날 대홍수로 천하가 물에 잠겼는데, 이 산 꼭대기에 수리(독수리)가 앉을 만큼만 남아서 수리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전에 견불산(見佛山)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진흥왕 때 왕손인 운산대사가 몽불수기(夢佛受記, 부처님을 친견하고 당대에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를 받아 견불산(見佛山)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수리사의 북서쪽 산자락에 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있어 견불산(見佛山)이라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태을산이었으나 수리산의 주봉이 된 태을봉(太乙峰). ‘태을(太乙)’이란 도가에서 태을성신(太乙星神)을 말하는데, 이는 병란이나 재앙, 인간의 생사를 다스리는 별이다. 또 풍수지리에서는 큰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 내리는 모습을 매우 귀한 지상(地相)으로 꼽는데, 그런 형상을 천을봉(天乙峰), 태을봉(太乙峰)이라 부른다고 한다. 태을은 또 태일(太一)로서 천지창조의 혼돈의 원기를 뜻한다. 수리산 산줄기는 보통 X자형, H자형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수리산의 산줄기 능선을 그려보면 독수리가 막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수리사가 우리 도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전님께서 49일간 불음불식 공부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도전님께서는 1968년 6월 25일 이곳 속달리 수리사에 도착하셔서, 용신당, 삼성각, 법당에서 공부를 하셨다.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공부를 하시기 이전, 도전님 조상의 묘가 수리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무덤 주변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이 분이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내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낙향한 도전님의 13대조인 박홍구(朴弘耉, 1552~1624)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8년 기준으로 보면 330여 년 전이다. 도전님께서는 13대조의 묘를 괴산의 선산으로 이장을 하셨다. 도전님의 13대 조상께서는 도전님께서 공부를 하러 오실 때까지 이곳 수리사를 줄곧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만사분이정 부생공자망(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교법 제3장 47절)이라 하였듯이, 만사는 이미 정해져 있고 상제님의 도수는 이처럼 물샐 틈 없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수리사의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좌청룡, 오른쪽에 우백호의 산이 자리하고 있고, 한일자로 가로막혀 보이는 산이 있다. 이 산을 동네사람들은 자물쇠산(일명 잠금산)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무성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산 정상에서 보면, 꾹 다문 입술처럼 보인다. 도전님께서 수리사로 들어오실 때, 자물쇠산을 열고 들어오셨다고 한다. 도전님의 13대조께서 수리사 입구를 지키고 계신 것과 함께 자물쇠산이 수리사의 잠금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공부하신 이후로, 도장터널, 수리터널(1999년 개통), 수암터널(1999년 개통), 반월터널, 능내터널 등 여러 개의 터널이 개통되어 수리산을 지나가고 있다.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공부하던 당시 주지승은 청운스님이었다. 청운스님이 처음에는 도전님을 간첩으로 오인하여 도전님께서 공부하는 것을 몰래 엿듣다가, 도전님께서 방문을 세게 열자 바닥에 나뒹굴어 쓰러지면서 전생(前生)을 보았는데, 도전님께서는 서가여래, 본인은 서가여래의 3천제자 중 한명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청운스님이 도전님을 지극 정성으로 받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화다.

수리사에는 천왕문을 지키는 사천왕은 없지만,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숫호랑이와 암호랑이가 있다. 길을 따라서 수리사를 오르다보면,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이 오른편에 있는 큰 바위이다. 도전님께서는 이 바위를 바깥쪽에서 지킨다고 해서 숫호랑이 바위라고 하셨다. 그리고 조금 더 길을 오르다보면 같은 방향인 오른편에 숫호랑이보다는 작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도전님께서는 이 바위를 안에서 지킨다고 하여 암호랑이 바위라고 하셨다.

수리사는 한국전쟁 당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2002년에 지어진 것이고, 원래의 대웅전은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청운스님이 도전님께 대웅전을 옮기려고 하는데 어느 위치가 좋은지 조언을 구하자, 도전님께서 직접 그 위치를 정해주셨다고 한다. 본래 수리사 대웅전은 동쪽에 있던 것을 서쪽으로 옮겨 건립되었다.

도전님께서 공부하신 요사채의 뒤편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제법 규모가 큰 축대를 여럿 만나게 된다. 옛날 전각으로 사용되었던 터로 짐작되는 곳이 꽤 여러 군데에 걸쳐 있다. 이것을 토대로 보면, 본래 수리사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일까?

도전님께서 공부하던 당시, 사람들은 수리사를 찾으면 대웅전이 아니라, 수리산(견불산), 즉 동쪽의 산을 보고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수리산에 부처 형상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도전님께서 공부하고 계시던 요사채를 향해 인사를 드리는 것 같았다고 해서, 저기에 누가 계시냐고 물었다고도 한다.

본래의 수리사의 건물들이 동쪽의 산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던 것은 수리산의 부처 바위 때문이었다. 부처를 보았다고 해서 견불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인데, 부처 바위를 등지고 건물을 지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수리사의 스님들을 비롯하여 수리산에 부처 바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바위는 한편으로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이루기도 한다. 부처 바위가 있는 곳은 슬기봉의 능선자락인데, 슬기봉 옆으로 군사시설이 들어서서, 접근금지구역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등산객들도 찾지 않는다.

 

수리사 진입로에 죽암마을이 있다. 지금은 벽화마을로 유명해진 곳이다. 옛날 훌륭한 죽림(竹林)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대두목이자 죽산 박씨로 오신 도전님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도주님께서 49일간 불음불식 공부하신 곳이 부산 ‘마하사’고, 도전님께서 공부하신 곳은 ‘수리사’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의 경천 『천수경』 첫머리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시작되는데, 이는 영화나 드라마에 인용되어 익숙한 주문이다. ‘마하수리’는 마하사와 수리사를 연상케 한다.

수리사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로(速達路)에 있다. 속달은 빠르게 보내는 우편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수리산의 골짜기, 즉 ‘안(內)’을 의미한다. ‘속’은 내포(內包)를 뜻하는 ‘리(裏)’ 또는 알맹이를 뜻하는 ‘정(精)’을 나타낸다. 한편 ‘달’은 땅이나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사달’은 ‘아침의 땅’으로 ‘조선’과 같은 뜻이 되며, 달=띠=땅이 모두 지(地)를 나타낸다. 후천은 건곤의 위치가 바뀌어 지천태(地天泰)가 된다. 또한 후천을 달세상이라고 하니, 속달은 후천세상의 알맹이를 뜻한다. 따라서 도전님께서 속달리 수리사에서 49일간 불음불식 공부를 하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견불산의 부처현상의 바위도, 후천세상의 알맹이의 기운을 간직한 속달리라는 지명도 이미 정해진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