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금산사)

 

모악산 금산사는 모악산(母岳山)의 산세가 연꽃 모양의 배가 중생을 가득 싣고 서방정토로 떠나는 형세라 하여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모악산은 김제군에 있으며, 상봉에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모악산은 금산(金山)으로 불리었다. 금산사(金山寺)도 산 이름인 금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황금이 이 산에 많기 때문에 금산이라 불렀고, 금이 많이 묻혀 있어서 이 근방의 지명들도 김제(金堤), 금산(金山), 금구(金溝), 금평(金平) 등 금(金)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금산사는 599년에 창건되어, 766년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중창하여 법상종을 열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금산사는 창건 당시만 해도 작은 절에 불과했지만, 진표율사가 중창을 함으로 인하여 대가람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전라도 만경현에서 태어나 12세때 출가한 후 미륵님을 신앙하다가 27세에 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方)에 들어가 망신참법(亡身懺法: 몸을 잊을 만큼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여 이를 이겨냄으로써 과거의 죄악을 씻어내는 참회법)이라는 독특한 참회법으로 일심으로 구도한다. 진표의 극진한 기도에 감동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진표에게 모습을 드러내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부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수행 장소를 옮겨 더욱 정진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그 앞에 나타나 그의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과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셈이다.

 

금산사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3·7일(3×7=21) 공부 끝에 미륵불의 계시를 통해 창건되었으며,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와 함께 미륵불의 성지이다. 미륵전 터는 용추라고 해서 원래 용이 살던 연못이었는데, 미륵불의 계시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우고, 솥을 걸고 그 위에 미륵금상을 세웠다.

용추는 9마리 용이 산다고 할 정도로 그 깊이가 깊어서 진표율사가 인부 천여 명을 써서 메우려고 해도 도저히 메워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7일간 기도를 드리니 미륵불이 나타나서 전국에 눈병을 돌게 할테니, ‘참숯을 한 지게씩 지고 와서 용추에 넣고 그 물로 씻으면 낳는다.’고 소문을 내라고 하였다. 정말로 눈병이 돌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도저히 메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용추못도 메워지게 된다.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1m 정도 땅을 파 들어가면, 숯이 나온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돌로 연화대를 세우고 그 위에 미륵불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잠만 자고 일어나면 연화대가 저 멀리 튀어 나가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몇날 며칠 반복되니 진표율사는 다시 7일간 기도를 드린다. 미륵불이 나타나서 말하길 “불 위에 돌을 얹으면 돌이 튀는 법이다. 솥으로 연화대를 만들어 그 위에 미륵불을 조성하라.”고 전한다. 숯이 불이니 그 위에 돌로 만든 연화대를 세웠으니, 돌이 튀는 이치였다. 그래서 진표율사는 무쇠로 연화대를 만들고 그 위에 미륵금불을 세웠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 라」고 하셨도다.(행록 제5장 29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眞 理)를 밝혀 주신 것이다.(『대순지침』 p. 14)

용추못은 1.6 水 근본을 상징하며, 하도용마와 신구낙서가 모두 물속에서 나타난 것 역시 물이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용추를 숯으로 메운 것은 1917년 정사생(丁巳生)으로 오신 도전님을 나타내며, 그 위에 솥과 미륵불은 양산(兩山)의 진리로서 솥의 이치로 오신 조정산(趙鼎山) 도주님과 시루의 이치인 강증산(姜甑山) 구천상제님을 상징한다. 솥 위에 시루가 있어야 떡을 찌을 수 있고, 솥 밑에는 불(숯)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루는 조화를 부릴 수 있게 되며, 이것을 진리라고 한다. 또한, 양위상제님에서 더 나아가 삼위상제님으로 이어지는 천부적인 종통을 상징한다. 이것을 연원(淵源)이라 하며,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불멸의 진리인 것이다.

또한 금산사 미륵금불은 그동안 세 번의 변화를 거쳤다. 진표율사가 금불(金佛)로 33자 높이로 창건한 후, 1598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 수운대사가 36자 높이의 목불(木佛)로 다시 재건하였다. 1934년 실화로 인하여 미륵전 주불만이 소실되어 성열대사가 39자 높이의 석고불(土佛)로 재건하였다. 금불에서 목불로 그리고 토불로, 33자에서 3자씩 늘어서 36자, 다시 3자가 늘어서 39자가 되었다. 즉 삼변(三變)한 것이다. 이것은 구천상제님, 도주 옥황상제님, 우당 도전님 세분으로 이어지는 대순진리회의 종통을 나타낸다. 상제님께서도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진다고(예시 87절 참조) 말씀하셨다.

또한 미륵금불의 삼변을 오행적으로 살펴보면, 金→木→土로 변화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금극목, 목극토로서 상극의 원리이다. 선천세상을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였기 때문이며, 土가 극하는 것은 水이기 때문에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水이다.

상제님께서는 천지에 수기가 돌지 않고 있고, 수기가 돌때에 와지끈 소리가 난다고 하셨다.(공사 제3장 20절, 예시 51절 참조)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에는 수기가 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금산사 미륵금불 역시 상극의 원리로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금산사지적지』에 의하면 대장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중창하면서 미륵전의 정원 중앙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는 목탑이었다. 당시의 모습은 현재와 달리 탑과 같은 형태를 띠었는데, 맨 꼭대기에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장치하였다고 한다. 대장전 역시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1635년에 재건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1922년 미륵전 앞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미륵전의 우측편에는 정면 7칸, 측면4칸의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 역시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조선 인조 13년(1635년)에 재건되어 대웅광명전(법보화삼신불)과 극락전(서방삼성), 약사전(약사삼존)에 봉안하고 있던 오여래 육보살을 다시 조상하여 한자리에 봉안하고 대적광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1986년 12월 6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어 1987년 1월 1일 보물 476호에서 지정이 해제되었다. 보통 절에서는 성격이 다른 불․보살들이 각자 다른 법당에 봉인되어 있는데, 유일하게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성격을 달리하는 모든 신성 불․보살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제1장 9절)

 

마치 상제님의 강세를 호소하는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대적광전 역시 1986년 12월의 화재로 인해 전소하였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의 옷가지를 태워서 신명계로 보내주곤 한다.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면서 종이를 태우는 것도 신명계의 공사를 보기 위함이다. 이처럼 대적광전이 화재로 모두 불탄 것 역시 그런 맥락으로서, 대적광전의 오여래 육보살이 소임을 마치고 다시 신명계로 돌아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금산사의 중요성은 양산의 진리로 대표되는 종통의 맥과 함께 상제님께서 친히 미륵전 미륵금불에 30년 동안 영으로 계셨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30년 동안 계신 미륵금불은 1934년의 화재로 인해 토불로 다시 조성되어, 그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상제님께서 30년 동안 영으로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도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상제님께서는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리셨지만, 그가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하였기에 1871년(辛未)에 직접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시게 된다. 최제우는 유교의 틀을 유지한 채 동학을 펼치려 하였고, 이것은 그가 양반들에게 동학이 유교와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유교의 반상의 차별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시는 후천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최제우는 용담유사(龍潭遺詞)의 교훈가(敎訓歌)에서 “나는 도무지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舍近取遠) 한단 말이냐?” 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자신이 죽고 8년 뒤에 상제님께서 친히 이 땅에 강세하심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따르던 동학도들은 최제우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미륵불의 성지인 금산사는 대순진리회의 종통과 연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성지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미륵금불은 타고 없지만,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기 전에 30년 동안 영으로 계시며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한 곳이기도 하다.

금산사 미륵금불은 손에 여의주를 들고 있다. 하지만 부처가 여의주를 쥐게 되는 경우는 약사여래불에 한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생의 병고를 고쳐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원력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금산사의 미륵금불 손에는 여의주가 들려있다.(행록 제2장 16절 참조)

금산사 일대는 미륵 용화세계를 실현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금산사 일대가 옛날에 용추였고,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용은 여의주를 물어 그 기운을 취해야 승천과 하천을 마음대로 하고 조화를 부릴 수가 있다. 금산사 용추 일대의 기운은 거대한 용맥의 출현으로 웅장한 힘을 발휘하는데, 이것을 진표율사가 알고 기운을 모아 금산사에 오실 미륵불의 손에 여의주를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은 그 기운으로 풍운조화를 부릴 수 있고, 용추 주변의 용들의 기운을 누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산사 일대의 맥은 기운이 다른 곳으로 분열되지 않고, 주위의 모든 기운이 금산사 미륵불에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상제께서 금산사에 대해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글을 끝맺으려 한다.

 

금산사에 상제를 따라갔을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

 만국 활계 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 명월 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 개화 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 운통 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

란 구절을 외워 주셨도다. (예시 14절)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