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
 『전경』에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道昌中有泰仁下有大覺)”(예시 1장 45절) 이라고 하였는데, 필자는 이 구절에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인에 답사를 가서 직접 살펴보니, 봄철에 눈 녹듯이 그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풀리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각교에서 보면 위에는 도창현이 있고, 중간에는 태인 사거리가 포함된 태인이 있고, 아래에는 대각교가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상유 도창


무극도장(無極道場)
상제님께서는 태인에 자주 머물며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 샘이라.」고 하시고「도는 장차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응기하여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 후천의 도통군자에는 여자가 많으리라.」하시고「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道昌中有泰仁下有大覺)이라고 말씀하셨도다.”(예시45절) 상제님께서는 1909년(己酉) 1월 1일 사시(巳時)에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종필하고, 한 벌은 친히 품속에 지니고 한 벌은 도창현(道昌峴)에서 불사르고 나머지 한 벌은 경석의 집에 맡기셨다. 이곳 도창현에는 종통을 계승한 도주님께서 창도하신 무극도가 있던 곳이며, 그 옆으로 관왕묘가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1923년(癸亥)에 도장영건 추진위를 구성하고 갑자년 11월에 도창현에서 밀양의 이우형 · 김용국 ․ 박 민곤, 안동의 권태로, 청송의 조호규, 의성의 김장회, 봉화의 박붕래, 김천의 김규석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庚은 변경지이시(變更之伊始)하고 申은 신명지의당(神明之宜當)이라.
       천어사어경신(天於斯於庚申)하고 지어사어경신(地於斯於庚申)이라.
       만물종어경신(萬物終於庚申)하고 아역여시경신(我亦如是庚申)이라.“

 

그후 도주님께서는 1925년(을축) 4월 15일 태인 도창현(道昌峴) 5천 5백평 대지 위에 도장을 완공하였다. 도장의 규모는 영대(靈臺)와 옥경대를 본뜬 도솔궁 그 밖의 건물 총 19동  240여 간으로 웅장하였다. 4월 28일 영대 봉안 치성을 올리시니 명실상부한 도단이 형성되었다.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다.

 

종지(宗旨)
음양합덕․신인조화․해원상생․도통진경(陰陽合德  神人調化  解冤相生  道通眞境)

신조(信條)
사강령(四綱領)…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 삼요체(三要諦)…성(誠)․경(敬)․신(信)

목적(目的)
무자기(無自欺), 정신개벽(精神開闢), 지상 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 인간개조(人間改造), 지상 천국 건설(地上天國建設), 세계개벽(世界開闢)

 

1928년 11월에는 도세를 확장코자 함경북도에 나가 삼림벌채사업을 계획하고, 경상남도에서 300명을 모집하여 단체 이주를 시행했는데 날씨가 추워 사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자 진업단을 조직하고 현금 1만원과 백미 300석을 투입하여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석지 개척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대부허가 수속을 밟지 않아 원산도 간석지는 보령군청에 빼앗기고 안면도 간석지는 일본인이 대부허가를 얻어서 빼앗아 갔다. 1930년 1월 11일 일제가 경기부양을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하자 도주께서는 금광개발에 뛰어들었다. 1932년 전주 이서의 사금광과 충북 음성의 무극 광산 등 72광구의 채광 허가권을 가지고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간척사업이 실패하고 광업도 경영난에 빠져 광구 전부를 팔아버렸다. 또한 일본의 탄압이 날로 기세를 더해가면서 황민화 정책에 협조할 것을 요청해 오자 단호히 거절하였다. 1935년(乙亥) 12월 31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종교단체 해산령이 내려지자 1936년(丙子) 1월 1일 무극도를 해산하셨다. 이로써 무극도는 막을 내리고 도장 건물 및 재산 일체가 몰수되어 지금은 도장 뒤의 치마바위만 옛일을 알려준다.

 

 

도창현 고갯길(차가 있는 곳이 무극도장 입구. 지금은 고물상으로 변했음.)


 

 

(2)중유 태인(泰仁) 

백제 때 태시산군(太尸山郡)으로 고을 터가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태산군(泰山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에 들어 영주관찰사의 속현이 되었다가 태산현 사람 임몽고불화가 몽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354년(공민왕 3년) 고려에 원방을 청하는 원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돌아오자 그 공으로 태산군으로 승격되었다. 또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으로 고을터가 태인면 백산리에 있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무성(武城)이라 고쳐 태인군(泰仁郡)이라 일컫고 영주관찰사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서서 태산현감이 겸임하게 되어 인의현민들이 동쪽에 떨어져 있는 태산읍에 다니기가 힘들어 1409년(태종 9년) 두 고을을 합하여 태인(泰仁)이라 불렀다. 태인은 유학(儒學)이 번성했던 곳으로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냈고 불우헌 정극인이 향학당(鄕學堂)을 설치하였으며, 1544년 신잠(申潛)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4학(四學: 동․서․남․북)을 설립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1696년 무성서원(武城書院)에 현판이 내려지고 1716년 피향정(被香亭)을 국고로 중건하였으니 모두 최치원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업이었다.  

 

(3) 하유 대각 -대각다리

310여 년 전 홍수가 나면서 다리가 떠내려가자 칠보면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1이 길고 큰 돌로 다리를 만들어 ‘큰 다리’, 혹은 ‘태거교(泰居橋)’, ‘대각교(大脚橋)’라 불려졌다. 대각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내려 온다. 조선 숙종 때 둔촌 민유중(屯村 閔幼重)1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중에 이 다리에서 쉬어 가는데, 그 일행 앞에 지나가던 거지 소녀가 자신의 여덟 살짜리 딸과 너무 닮아 출신을 물으니, 성은 최가고 부모들은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비록 옷은 남루하였으나 용모가 단아하고 총명하였으므로, 그 소녀를 데리고 가서 잘 길렀다고 한다. 숙종은 첫 부인인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왕후로 민유중의 딸 민씨를 선택하였지만 장희빈의 아름다움에 빠져 민씨를 내쫓고 말았다. 그러자 민씨를 모시던 최씨는 밤낮으로 민씨를 위해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암행에 나섰던 숙종이 그녀를 발견하고 옛 주인을 사모하는 갸륵함에 감복하여 곁에 두어 왕자를 낳으니 그가 바로 영조다. 최씨 부인은 상궁에서 숙빈으로 승격되었다. 요즘 MBC 인기드라마로 방영되는 “동이”가 바로 그 최숙빈의 이야기이다. 

본래의 대각교는 폐교되고, 새로운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를 거산교(居山橋)라 부른다.(아래 사진에서 볼 때, 대각가든 옆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깨달음이 있어야 대도가 융창한다는 말로도 생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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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잉걸 [朴仍傑, 1676~?]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웅(汝雄), 호는 모은(慕隱), 개명(改名)은 종원(宗元)이다. 1676년(숙종 2)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이르러 활발한  자선활동 을 폈다.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하천에 대각교(大脚橋)라는 다리를 놓고, 태인 고을 육방(六房)에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아전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정읍시 칠보면  백암초등학교  주변은 ‘ 걸치기 ’라고 불리는데 이는 박잉걸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언제라도  옷을 가져갈 수 있도록 나무에 옷과 신발을 걸어놓은 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춘궁기 에는 집의 곳간을 열어 밥을 제공하고,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2)둔촌 민 유중(屯村 閔幼重):조선 숙종의 장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숙종 때 호조판서가 되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다. 경서에 밝아 사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3) 최치원(崔致遠, 857~?) :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신라시대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정극인(丁克仁, 1401~1481) :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 절의가 높고 영달을 탐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쓴 공으로 삼품교관이 되었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상춘곡》을 지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