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본전 영대 상량식>


여주본부도장                                                              

 

여주본부도장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가야리에 위치하고 있다. 1969년 서울 중곡도장을 본부도장으로 하여 종단의 기본사업과 3대 중요사업에 힘써오다가, 도세(道勢)가 확장됨에 따라 1993년에 종단의 중앙 본부를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중엽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청담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남한강이 젖줄처럼 흐르는 여주는 일찍이 대동강변의 평양, 소양강변의 춘천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으로 손꼽힌다.”라고 하였다. 청동기시대부터 쌀농사가 시작된 여주는 쌀과 도자기, 땅콩 등의 특산물이 나는 기름진 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주에는 조선왕실 중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있고, 최근 들어 조명을 받고 있는 명성황후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또 명성왕후와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팔비(八妃)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다. 그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는데,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됐다. 영릉은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고통을 겪고 왕위에 오른 후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으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다.

여주에는 서희장군의 묘를 비롯하여 노론의 영수요 효종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사당 대로사(大老詞)와 북벌계획의 명장 이완대장의 묘가 있다. 이완은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로 하여금 신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두 사람의 사원과 묘의 방향이 세종대왕 옆에 있는 효종의 묘를 향하였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명성황후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妃)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명성황후생가는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여주의 역사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신륵사이다. 여주군을 관통해서 흐르는 한강을 ‘여강’이라 부르는데, 신륵사(神勒寺)는 여강이 유유히 흐르는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륵’ 이라는 이름은 신기한 미륵이 굴레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 신륵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됐다. 유유히 흐르는 강변에는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는 8각정 누각이 암벽위에 서있다.

봉미산 신륵사 앞 나루를 조포(潮浦)나루라 하는데, 예로부터 마포, 광진포, 이포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라 전해온다. 조선시대에는 영릉의 원찰(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 되면서 또 한 번의 중창의 기회를 맞았다.

 

여주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이 완만한 경사를 지으며, 한강을 끝으로 그 모습이 서서히 멈춰지는 곳으로 평야와 맞닿는 지역을 형성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멀리 충청도에서 치어 올라와 오대산에 이르러 태백산맥과 연결되면서 여주의 남쪽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다.

북쪽으로는 광주산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려와 여주의 금사면에 와서 점점 구릉성 산지를 만들며 그 치맛단을 장식하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은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게 보이는 곳(野平山遠)”이라고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세 산맥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작은 하천을 이루며 남한강으로 모아져 여주를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을 배경으로 여주본부도장은 산을 등지고 강이 바라보이는 대표적인 명당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지세에 혈(穴)은 매화낙지혈(梅花落地穴)로서 보기 드문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천장길방지(天藏吉方地)이다.

매화는 고결한 꽃이며 그 꽃이 떨어지면 향기가 사방에 퍼지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發福)이 큰 땅이다. 또 매화는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가장 먼저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희망의 꽃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이것을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다. 매화는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며 앞서가는 선구자의 영혼에 비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씨를 퍼뜨리는 매화를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삼았다.

매화낙지(梅花落地)란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바람에 날리며 하얗게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중곡도장이 위치한 자리가 선녀(仙女)가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형국인 선녀포태혈(仙女胞胎穴)이라면, 이곳 여주본부도장은 도(道)가 완전히 펼쳐져나가는 형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화낙지혈은 예로부터 자손번영과 풍요의 명당으로 전해온다.

 

여주본부도장의 좌향(坐向)은 인좌신향(寅坐申向)이고, 연건평은 24,757평으로 30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86년 4월 10일 신(申)시에 여주도장 기공식을 거행하고, 6월 11일 신(申)시에 본전의 정초식을 하여, 본전(本殿: 현 봉강전), 내정(內庭), 정각원(正覺院), 숭도문(崇道門), 대순성전(大巡聖殿), 종무소(宗務所), 종고각(鐘鼓閣) 등을 불과 4개월 만에 완공, 10월 25일에 영대봉안치성(靈臺奉安致誠)을 올렸다.

일반 사찰의 경우 이 정도 규모의 한옥 건물을 지으려면 단청하는 시간만 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적으로 3년에서 5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건물을 불과 4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도(道)가 신도(神道)이며, 도장 건립에는 천지신명이 역사하여 신인(神人)의 조화(調化)로 작업하게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 후 1990년에 현 본전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시학(侍學) 및 시법(侍法) 공부와 수강(授講)이 실시되고 있으며, 91년부터 시작된 시학 · 시법공부는 매일 36명을 1개(個) 공부반으로 편성하여 1년에 12,960명이 공부에 임한다. 또 수도인들의 자질을 높이고 교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72명을 1반으로 2박 3일씩 수강을 하고 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