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염제신농씨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성군(聖君) 삼황(三皇: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중 한 분이다. 그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제후 유교씨(有嬌氏)의 딸이자 제후 소전씨(小典氏)의 비(妃)로, 어느 날, 그녀가 화양(華陽)으로 나들이 갔다가 신비스럽게 생긴 용(龍)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 후 임신을 하여 열 달이 지나자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바로 신농씨이다. 그는 천수[天水: 현 감숙성 위천현(甘肅省 渭川縣)]에서 태어났고, 강수[姜水: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陝西省 岐山縣)]로 옮겨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런 연유로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강성(姜姓)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이다.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서술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강씨는 염제신농씨가 그 시조이며 인류 최초의 성(姓)인 태호복희씨의 풍성(風姓) 다음으로 출현한 성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경』에서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 · 풍신(風身) · 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元始)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행록 제4장 17절)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풍성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은 강성이 된다. 개벽시대에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이치로 상제님께서 인세에 오실 때 강씨가(姜氏家)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

 

인류를 위한 신농씨의 가장 큰 공로는 불(火)을 사람들이 제대로 다룰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처음 흙으로 만든 그릇을 구어 단단한 토기를 만들었고 쇠를 녹여 여러 가지 이로운 연장들을(도끼, 쟁기 등) 만들었다. 또한 그는 불을 관장하는 다섯 관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 불리기도 했다.

불의 이용과 아울러 신농씨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가장 큰 혜택은 농사짓는 법이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아직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길러낸 곡식을 거두는 본격적인 농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짐승을 잡아먹고 숲의 과일을 따먹을 뿐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신농씨는 우선 불의 신답게 산과 들에 불을 놓았다. 불을 놓으니 잡풀과 나무들이 탄 재로 땅은 기름지게 되었고, 풀과 나무의 뿌리가 굳은 땅에 틈새를 만들어 갈아엎기도 한결 수월해졌다. 이렇게 불로써 거친 땅을 고르고 나자 그는 곡식의 씨앗을 얻어와 그 땅에 뿌렸다. 불을 놓아 고른 밭에서는 만족스런 가을걷이가 이루어졌다. 신농씨 덕택으로 사람들은 곡식을 심고 수확하여 훨씬 생활이 안정되었다.

신농씨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월남에서는 그를 시조신으로 숭배한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들고 왼손에 악초를 움켜쥔 그의 모습은 신화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생동감 있는 그의 그림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소머리를 한 모습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유명한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연상시키지만 이미지에서는 정반대의 차이가 있다. 동양에서는 동물적인 모습이 신성시되지만, 서양에서는 괴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동양의 자연중심 사고와 서양의 인간중심 사고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한 신하가 신농씨를 찾아왔다. 신하는 그에게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한 노인을 봐달라고 간청했다. 아무도 노인이 아픈 원인도, 그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도 알지 못했다. 당시 약이나 의료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곧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떻게 백성이 아파서 죽어 가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못하고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가?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의약지식을 넓히기로 했다.

이후 신농씨는 매일 숲으로 가서 야생초를 채취하고 성분을 가려내기 위해 직접 맛을 보았다. 그는 자편(赭鞭)이라고 하는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 종의 약초를 채찍질 했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 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각 종 다른 성질의 약초를 이용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신농씨는 약초들을 맛과 특성에 따라 분류했다. 여기서 그의 투명 복부가 큰 몫을 해내는데 어떤 것이 독초이고 약초인지 구별하는 역할을 해냈다. 그는 약초, 수없이 많은 열매와 야채를 찾아냈다. 또한 직접 맛을 보는 시험 과정에서 신농씨는 식물의 성장, 토양과의 관계, 적절한 성장 시기에 대한 지식도 쌓았다.

결국 신농씨는 365종의 각종 약초를 조합해서 약을 만들어 4백 가지 이상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처방약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본초(本草)』 또는 『신농본초(神農本草)』인데 현재 남아 있지는 않다. 이 책에는 약물의 명칭, 형태, 산지, 채취 시기, 약효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 천년이 지나 한나라 학자들이 그의 발견에 바탕을 두고 책을 엮어 냈는데 바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다.

신농씨는 대량으로 식량을 경작, 처리, 보관하는 계획안도 수립했는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농업 산업시대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어떻게 신농씨는 성분을 알 수 없는 그 많은 풀들을 맛보면서 중독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까? 실수로 중독된 일은 없었을까?

실제로 신농씨는 하루에 어떤 때는 70번까지 중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독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를 개발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차(茶)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농씨가 처음 차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물을 끓이기 위해서 불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땔나무에 있던 나뭇잎 몇 장이 솥으로 떨어졌다. 직업 재해라고 할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맛볼 준비가 되어 있던 그는 이 물도 한 모금 들이킨다. 놀랍게도 이 물은 그의 몸 안에 있는 독소를 해독해 줬다. 게다가 120살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했다.

불행히도 신농씨가 항상 차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생이 다 되었을 때 그는 ‘장을 끊는 풀’이라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해독제를 제때에 마시지 못해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심 없는 그의 행위는 전설이 되어 남았다.

 

또한 신농씨는 천문역산(天文历算)분야에서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복희씨(伏羲氏)가 발명한 팔괘(八卦)에 기초해 64괘를 내놓았는데, 이를 이용하여 점(占)을 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다. 이밖에도 신농씨는 시장(市場)이라는 것을 두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즉,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시장이 서도록 하고 얼마쯤 지나면 끝나도록 했다.

사람들에게 노동후의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신농씨는 오현금(五弦琴)을 만들었다. 오현금은 새소리와 같은 미묘한 음을 낼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아들에게 ‘종(钟)’이라 이름을 지은 악기를 만들어주었고 많은 가곡을 창작했다.

이와 같이 신농씨는 인류에게 농경법과 농기구의 제작을 가르쳐 수렵에서 농경시대로 접하게 하였고, 약초를 구하여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의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차를 비롯해 음악과 점서(占筮), 교역법 등을 계발함으로써 인류의 삶과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경칩 후 해일(亥日)에 임금이 직접 선농단에 나아가 선농제(先農祭)를 지내며 농업신인 신농씨와 곡식의 신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였다. 농촌에서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될 무렵이면 그 마을의 상징이며 농신(農神)인 신농씨와 관계된 농기(農旗)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때 그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사명(神農司命)’ 등의 글자를 넣어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였다.

제를 지내고 왕이 몸소 밭갈이를 시범하는 친경(親耕)이 끝난 후, 임금은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는데 바로 그 음식이 소뼈를 푹 고은 ‘선농탕’이었다고 한다. 이 선농탕은 발음하기 쉽도록 지금의 설령탕이 되었다고 한다.

 

상제님께서는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고(예시 22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류가 신농씨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왔지만 수천 년 전의 인물인 신농씨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인류를 위해 베풀어준 은덕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그 업적을 충분히 기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농기나 매약(賣藥)에 “신농유업”이란 글귀를 써 붙임으로써 농업과 의약의 시조로 알려진 신농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였다. 정말로 신농씨가 인류를 위해 불의 사용과 농경시대를 열었고, 하루에 수십 차례 중독되면서 약초를 구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희생(自己犧牲)을 몸소 실천하였건만, 세상 사람들이 이를 등한시 한 것 같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신농씨의 그런 숭고한 마음을 모르고 등한시 하여, 은혜를 입었던 모든 신명이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공사를 보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