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조선조의 정사(正史) 『조선왕조 실록』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3,000여회)하고,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인 만동묘를 세우게끔 한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요,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우암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미수(眉搜) 허목(許穆)등과 같이 산림(山林)으로서 진출한 인물이다.

아버지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와 어머니 선산 곽씨(善山郭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永甫) 호는 우암(尤庵) · 우재(尤齋) ·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충남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 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어릴때 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세살 때 이미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 우암은 부친에게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친은 그가 태어날 때에 좋은 징조가 있었고 재기(才氣)가 또한 특이하였기 때문에 항상 원대한 포부를 가지도록 가르쳤다. 8살 되던 해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12세 때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 이이(李珥) · 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게 되었다.

1625년(인조 3년)에는 도사(都事)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에 사는 율곡의 수제자이고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사망한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1574~1656)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27세(1633)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고, 송시열은 인조(仁祖)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때 19세의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결국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여 전쟁이 끝나고 남한산성에서 나온 송시열은 좌절감에 낙향하여 황간(黃澗) 냉천리(冷泉里)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고자 군비확충과 군사 훈련강화에 전념하였다. 이때 효종의 정책에 따라 산림(山林)의 재야 학자와 척화파(斥和派)를 대거 기용하면서, 김집의 추천으로 송시열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의 관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함)와 복수설치(復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의 중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 등이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은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후 1653년에 충주목사, 1654년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시 1658년 7월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북벌 계획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우암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으며, 귀향할 결심을 하고 낙향하였다.

 

서인 일파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서인과 남인으로 대립되었던 조정은 학설상의 대립, 그 중에서도 국가전례(國家典禮)에 관한 이론대결이 팽팽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인(南人)계인 미수 허목은 동춘, 우암과 예론(禮論)에 대한 이 논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기해예송(己亥禮訟)이 그것이다. 예송은 예(禮)가 정치 문제화한 것으로서, 남인과 서인 모두 예치라는 기본 노선에는 찬성하지만 그 예의 실천 기준에는 해석의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다. 이 두 차례 예송은 모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의 기구한 운명과도 관계가 되는 사건이다. 인조의 계비로 왕비가 되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자의대비 조씨는 그 생전에 전처소생인 효종과 며느리인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을 모두 맞게 된다. 기해예송은 자의대비가 어머니로서 효종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갑인예송은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효종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각각 남인과 서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툰 사건이다. 이후 1668년에 우의정과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은거한다. 비록 송시열은 재야에 있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西人)들이 패배하자 그들은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경상도 장기(長鬐, 현 포항시)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는데, 남인(南人)들이 가중 처벌을 주장함에 따라 유배 기간 중에 죽음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즉 사형을 주장하는 청남(淸南)과 온건하게 처사 하고자 하는 탁남(濁南)으로 양분되었는데, 미수는 우암에 대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남(淸南)에 속하여 우암과는 상극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미수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년에 남인 일파가 서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실각한 사건)으로 삭탈관직을 당한 후 1년여 후에 사망하게 된다.

『전경』에 김사성의 아들 성옥이 죽었을 때 상제께서는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搜)를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시는데(제생 9절 참조), 이것은 미수와 우암간의 상극적인 기운을 상생의 기운으로 돌리시고, 이러한 상생 기운으로서 병자를 치유코자 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우암은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어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종신토록 녹봉을 받는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송시열은 김석주(金錫胄) · 김익훈(金益勳) 등 척신세력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비난을 받기에 이른다. 이 일을 계기로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를 겪었고, 1683년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4) 장옥정(장녹수)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아울러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禧嬪)으로 책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그때 송시열은 83세의 나이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제주도로 가던 송시열 일행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임시 피신을 한다. 바람이 잦기를 기다리며 보길도에 머무르는 동안에 송시열은 자기의 기막힌 심정을 한탄하며 바위 위에 한시로 새겨 놓았는데, 그 글씨가 아직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송시열의 글씐바위) 아이러니 하게도 그 반대편에는 그와 팽팽하게 대립한 남인인 고산 윤선도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도중 그 또한 풍랑으로 잠시 머무른 보길도의 모습에 매료되어 세연정(洗然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해 6월 우암은 신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남인들의 주장에 의해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당시 조선에서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 후인 숙종 20년에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년)으로 폐비 민씨의 복원을 반대하였던 남인이 대거 실권하고, 다시 서인(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모든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와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우암은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고, 전국 23개의 서원과 9개의 사우(祠宇)에 제향 되었다. 1776년에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것을 명하여 경기도 여주에 대로사(大老祠)를 세우게 하였다. 1785년 정조가 영릉(寧陵:효종의 능,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소재)에 행차하다가 생전의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곳에서 영릉을 바라보고 효종을 기려 통곡하며 후진들에게 북벌(北伐)의 대의를 주장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우를 짓도록 하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송시열에 대한 존칭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라 하였다. 남한강변에서 효종의 묘인 영릉과 마주보고 서있다.

또한 정조는 대로사의 비문을 직접 써주고, 국비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게 하였다. 마침내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모두 공인되기에 이른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에 간행된 『우암집(尤庵集)』 167권과 1787년에 출간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최고의 유학자로 훗날 ‘송자(宋子)’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도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기에, ‘정계의 대로(大老)’, ‘동방의 주자’ 등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 신봉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총 8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암이 평생 존경해 마지않은 주자(朱子)의 제자도 44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우암이 누렸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알게 하는 일면이다.

이는 상제님께서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행록 제1장 36절 참조) 천지의 정기를 타고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따라 명나라를 높일 것과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 자신의 뜻에 따라 문인 권상하에게 만동묘(萬東廟,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소재)를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임진란 때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이였다. 그는 인조때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네 글자를 받아 석벽에 새기고 그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우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고 유림들을 동원해서 만동묘를 지은 것이다. 이 만동묘에서 상제님께서 중요한 황극신 공사를 보셨다.(공사 제3장 22절 참조)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