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명의 빗장을 연 이마두(利瑪竇)

                                                                

지구촌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태동하여 인류사를 이끌어왔다.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늘날의 각색 종교는 그 정신의 본향을 동양에 두고 있다.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 도시 안에서도 교회와 절, 심지어 이슬람 사원까지 볼 수 있지만, 동서양 종교사를 통틀어 볼 때 한 국가 내에서 종교와 신앙의 다양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백여 년이 채 안 된다.

지난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앞서, 16~17세기에 구도의 열정으로 동양에 건너와, 동서양의 역사와 문명을 교류시킨 최초의 세계인이고 기독교적 이상을 동양에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가 이마두(利瑪竇)이다. 동서 문명은 그에 의해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여, 오늘날의 지구촌문명으로 성숙하고 있다. 

 

구도(求道)의 신념을 따라 중국으로 온 이마두,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마두는 중국식으로 개명한 이름이고, 본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이다. 그는 1552년 이탈리아의 마체라타(Macerata)에서 9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요한은 마체라타 시의 시장을 지냈고, 어머니 요안나는 믿음이 강하였다. 그는 성격이 활달하고 총명하였으며, 특히 기억력이 우수하여 책을 한 번 읽으면 즉시 암기할 정도였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의 서구 세계는 종교개혁의 불길에 휩싸여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가 대립하여, 이미 북부 유럽은 신교로, 남부 유럽은 구교로 지형도가 그려진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일어난 가톨릭 내부에서의 혁신운동으로, 인재양성과 선교활동, 신앙심의 확립과 외교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등을 꾀했다.

19세에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외지 선교를 희망하여 로마를 떠나 인도의 고아(Goa)에서 4년간 머물며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이어 1582년, 30세 되던 해에 중국의 마카오에 첫발을 내딛는다.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명(明)나라의 수도 베이징의 궁궐에 입성하기까지 십여 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마테오 리치가 아닌 이마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체험한 중국은 그 크기가 유럽 전체보다 거대했고, 오늘날의 용어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있어서도 결코 서양에 뒤지지 않았다. 서양 기독교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지 않았지만, 중국의 정신과 만나면서 그 위대함에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싹텄다. 그는 동서 문명을 교류시켜 통일하는 데 있어서 동양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마두는 세계의 다른 면에 펼쳐져 있는 문명의 광대함과 위대함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먼저 그 문명 속에 들어가 배우는 일부터 시작한다. 훌륭한 중국문화를 배우고 거기에 적응해 나가는 그의 태도는 명나라 고관과 사대부 사이에 큰 호감을 샀다.

중국에서 사제에 해당하는 계층이 승려이기 때문에 선교사들도 승려의 복색을 갖추고 활동했는데, 자오칭(肇慶)에서 최초로 선화사(僊花寺)라는 천주당을 세웠다. 1589년에 샤오저우(韶州)에 정착한 이후 중국인 구여기(瞿汝夔)를 교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구여기에게 천주 교리와 서양수학, 역학 등을 가르치면서 본인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고, 사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처음 입국시의 판단과는 달리 중국사회에서는 승려의 지위가 낮으며 또한 불교보다는 유교가 그리스도교와 친화력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승복을 벗고 사대부의 복장을 하여 학문을 구하는 유학자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대부의 복식은 리치 신부가 선비와 관료, 왕족 등의 상류층과 교류할 기회를 넓혀 주었으며 상류층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비상한 기억력과 언어 능력으로 단기간에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이마두는  먼저 친분을 나누게 된 중국인 관료에게 우정과 사교에 대한 서양의 금언을 모아 『교우론(交友論)』을 저술하여 선물한다. 교우론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선비와 관료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중국 사회에서 그의 입지를 크게 넓혀 준다. 인간성에 뿌리를 둔 이 '우정'이라는 화제가 서양과 동양을 잇는 최초의 책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이마두는 이미 중국 사회에서 명사가 되었는데,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서양인에게 대한 중국인들의 호기심, 그가 보여주는 신기에 가까운 뛰어난 기억력, 사서오경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풀이해준 놀라운 지적 능력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교를 시작한 지 19년이 지난 1601년에 마침내 베이징에 들어가 황제(萬曆帝)를 알현하고자 했지만, 환관들에 둘러싸여 있던 황제를 직접 알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자명종(自鳴鐘), 프리즘, 클라비쳄발로(악기), 천주상과 성모상 등 서양 진품을 진상하였다. 이때 자명종을 수리하고, 악기 연주법을 교수하면서 자금성에 머무르다가 베이징에 거주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게 되고, 또한 황제로부터 녹봉까지 지급받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2년에 새롭게 만든 그레고리 역법이다. 이마두는 그레고리 역을 한문으로 번역해 서양의 천문학과 역학을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청나라에서는 1644년 태양력의 원리를 이용한 '시헌력(時憲歷)'이 시행되었다. 시헌은 이마두의 호(號)이며, 시헌력은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만든 역법이다. 조선에서도 1653년(효종4년)부터 조선말까지 이를 사용하였으며, 1895년(고종32년)에 태양력이 채택되었을 당시 시헌력도 같이 참용(參用)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구력(舊歷)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그는 중국 밖의 세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알리고 은연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적 보편성을 전하고자 세계전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를 제작한다. 이를 통해 아시아인들은 중국 바깥의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고 전통적으로 확고했던 지리적 중화관이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마두는 중국 지식인은 물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天主實義)』(1603)에 이어 『기인십편(畸人十篇)』(1608)을 출간했다. 『기인십편』은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 대신에 동서문명을 융합하는 완숙한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1909년부터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이탈리아어로 중국 전교 역사를 서술하였다.

 

 『천주실의』의 서문은 “천주란 무엇인가, 곧 상제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천주실의를 통하여 이마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초기 유교의 상제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천주 신앙의 동일성이다. 이마두는 중국인이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을 받드는 것을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유교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가톨릭 교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겸허하게 배우고 일하는 과정에서 동서의 문명에 통달하고 문화의 다양성에 눈을 뜨게 된 신부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구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마두는 자신이 모시는 천주(天主)와, 유교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님 신앙이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천주실의』 제2편에서 “우리나라(서양)의 천주는 중국말로 상제이다(吾國天主卽華言上帝).”, “우리 천주는 곧 옛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이다(吾天主乃古經所稱上帝也).”라 하였다. 그리고 『중용』, 『시경』, 『주역』, 『예기』, 『상서』 등에 나온 ‘상제’의 용례를 들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받들었던 우주 주재자 상제님이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천주와 동일시한 것이다. '천주실의'(Do Deo Verax Disputatio)란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와 유교를 연결하려 했고, 유학에서 중시하는 자기수양을 강조하여 군자는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고 했다. 그는 중국 일반인들의 수신(修身) 교과서인 유학 경전들을 원용하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유교의 용어로 기술했다. 그리고 중국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동양적 기독교의 모형을 그려 내었다.

 또 『천주실의』에는, 후세에 서방 즉 인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불교가 들어와서 원시 유교를 오염시킴으로 말미암아 후대 문인들로 하여금 영혼 불멸을 부인하고 천당과 지옥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불교와 도교의 공(空)과 무(無)개념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지옥, 내세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기(理氣), 태극(太極) 등 이학(理學) 즉 신유학(新儒學)의 주요 개념도 부정했다. 이(理)는 결코 천주일 수 없으며 개체에 내재하는 형상(Form)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억지스러운 비판은 동서양 형이상학의 근본 차이에 대한 성찰과 이해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개념에 근거하여 시도한 이학 비판은 당시 유학자들로서 받아들이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마두는 온갖 고난을 헤치면서 사명완수를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기에 50대 후반에 이미 백발이 되었다.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이역만리에서 외길인생을 산 이마두는 1610년 5월 11일 베이징에서 운명하였다. 서방에서 온 현자(賢者), 서태자(西泰子) 이마두 신부는 자존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중국인들에게 매우 생소했던 기독교의 씨를 성공적으로 뿌리고, 그렇게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중화국 의(義)를 존경해 온 서양 유사(儒士)’의 덕을 인정하고 부성문(阜城門) 밖에 묘지를 하사하였다.

한편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마두는 매우 개방적이었다. 남경에 들어가(1595년 5월) 전도할 때는 승려들처럼 머리를 깎고 승려복을 입었고, 유학과 손을 잡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면 30분씩 시간을 들여가며 머리를 올리고 옷도 유학자들처럼 입고 다녔다. 그의 성격은 대단히 개방적이어서 아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 유학자들은 리치 신부를 대단히 존경하였고, 그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한 뒤 사후(死後)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다.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으며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 딴 것이었다.(교운 제1장 9절 참조)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르네상스 유럽의 자연과학 지식과 중국 사서오경의 학문을 한 몸에 갖춘 인간이 인류 문화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지구상에 등장한 것이다. 그는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를 처음으로 한 몸에 겸비한 최초의 세계인이자, 동양에는 서양의 문명을 소개하고, 서양에는 동양의 문명을 소개한 동서 문명과 역사 교류의 수로를 튼 인물이다. 그는 동서 문명을 교류시켜 통일하는 데 있어서 동양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할 당시에 이미 서양 기독교 문명 중심의 제한된 시야를 넘어서 있었다.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였다.(교운 제1장 9절 참조) 

 이마두를 서도(西道)종장으로 삼은 것은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그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고생하며 살다가 죽은 이마두의 원(冤)을 풀어주기 위함과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고, 동서 문명의 문운을 연 공덕이 아닌가 한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