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역(正易)으로 후천을 주창한  김 일부(金一夫)

 

 상제께서 해원시대를 맞아 청국명부(淸國冥府)를 一夫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심

 

19세기말 한국사회는 정치기강의 문란에 따른 탐관오리의 학정과 세금수탈의 고통 속에서 농민들은 더욱 헐벗게 되어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교세를 더욱 확대시켰으니 바로 동학(東學)이다. 동학은 대중신앙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민중에게 큰 영항을 주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김 일부(金一夫, 1826-1898)는 독특하고 심오한 사상체계를 제시하였으니 바로 정역(正易)이다.

일부는 1826년, 충남 황산군 모곡면 담곡리(黃山郡 茅谷面 淡谷里), 지금은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論山郡 陽村面 南山里)에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 국광(金國光)의 13대손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항(恒)이요 자(字)는 도심(道心), 호(號)는 일부(一夫)이다. 부친의 이름은 인노(麟魯), 자(字)는 원영(元靈)이고, 모친은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그는 용모가 남달리 비범하였고 키가 장대했다. 특히 상체가 커서 두 팔이 무릎아래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그의 가계(家系)는 당시 몰락한 잔반(殘班)계층으로 보이나, 그의 유년시절이나 청년기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웃 마을인 띠울에 낙향하여 살던 천문∙역학에 밝은 연담(蓮潭) 이 수회(李守會)에게 배우면서, 스승의 권고에 따라 고예(古禮)와 시문(詩文)보다 서전(書傳) 읽기에 골몰했다. 연담의 문하에는 동학의 최 수운과 남학의 김 광화와도 동문수학하였다. 

어느 날 연담은 최 수운, 김 광화, 김 일부를 차례로 불러 수운과 광화에게는 “장차 선도(仙道)와 불도(佛道)가 쇠퇴해 갈 것이니 너희들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우고 깊이 언행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일부에 대해서는 “그대는 장차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관담막여수(觀淡莫如水)요 호덕의행인(好德宜行仁)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 즉 맑은 것을 보는 것은 물만 같음이 없고 덕을 좋아하는 것은 인을 행함이 마땅하구나. 빛이 천심월에서 동하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라는 시(詩) 한수를 남기고 띠울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 일부는 스승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정진을 계속하여 54세 되던 해(1879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19년동안 서전읽기와 주역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영가(詠歌)와 무도(舞蹈)에 집중하여 어느 날 수도처로 삼았던 용바위에서 우주의 신비와 해와 달의 변동이치를 깨달아 풍운변태중(風雲變態中)에 천지와 더불어 출입하고, 일월성진(日月星辰)과 함께 그 기운 속에 빨려 들어 팔풍(八風)과 하나로 운동하여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니, 부지불식중(不知不識中)에 오성음(음아어이우)이 터져 나와 저절로 팔과 다리가 움직였는데, 그것이 밤이 새도록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것을 보고 집안사람들은 그를 물가에서 도깨비에 홀려 미쳤다고 하였으며, 또 당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던『옥추경(玉樞經)』까지 읽는다고 했다. 그는 훗날 이 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60평생에 미친 한 지아비는 항상 웃음이 많구나. 웃음 속에 웃음이 있으니 무슨 웃음을 웃는고. 능히 그 웃음을 웃고 웃으니 노래하는구나(六十平生 狂一夫 自笑人笑恒多笑 笑中有笑笑何笑 能笑其笑笑而歌).

그는 ‘천지무형지경(天地無形之景)’을 꿰뚫어 그의 오장에서는 ‘음아어이우’로 이루어지는 영가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음아생원’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공부에 열중하여 가사를 돌볼 틈이 없었던 일부는 살림을 파하고 다오개에 사는 매씨(妹氏)댁의 집과 은률에 사는 고종(姑從) 최 종하씨의 집으로 전전하였고, 마지막 거처인 다오개 최 생원의 집에서 임종했다.

연산(連山)에서 20여리 대전(大田)쪽으로 있는 양정고개에서 바라다보면 멀리 향적산(香積山) 국사봉(國師峯)이 보인다. 그 봉우리 중턱에는 일부가 동학란을 피하여 40여명의 제자를 이끌고 6년간이나 거처했다는 향산정사(香山精舍)가 있다. 그 좌우에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어서 마치 낙서(洛書)와 하도(河圖)의 중앙, 오(五), 황극(皇極)자리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명당자리에는 지금 그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새로 지은 향적산방(香積山房)에는 일부 정역을 연구하러 찾아드는 제자들의 발길만이 이어지고 있다.

주역의 깊은 연구를 통한 상수론적(象數論的) 논리에 따른 일부의 사상은 평등과 사랑, 조화를 염원하는 존공사상(尊空思想)과 황극정신(皇極精神), 유 ∙ 불 ∙ 선 3교로 집약된다. 일부의 정역괘도는 주역의 문왕괘도와 배열이 달라 주역을 통한 유교의 전통적 사상체계를 뛰어 넘은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는 주역과 정역의 관계를 선후천으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일부는 정역에 대해 주역을 계승·극복한 것이며, 주역은 상고의 복희역을 계승∙ 극복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복희역과 주역, 정역의 사이에서 생성∙성장∙완성의 연속적 변증법적인 발전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괘도로 집약되는 세계질서는 새로운 괘도의 세계질서로 전환됨으로써 선천이 후천으로 바뀌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주역의 체계는 “음을 누르고 양을 높이는 선천의 심법지학(心法之學)”이요, 정역의 체계는 “양을 고르고 음을 맞추는 후천의 성리지리(性理之理)”라 정의하였다. 억음존양(抑陰尊陽)을 봉건적 전통의 수직적 신분질서라고 하다면, 조양율음(調陽律陰)은 근대적 이념의 수평적 평등사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정역의 선∙후천사상은 하나의 혁명사상이요, 한말의 역사적 전환기에 요구되는 시대정신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공자를 선천의 성인으로 존중하며 천지의 유형지리(有形之理)를 통달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일부 자신은 천지의 무형지경(無刑之景)을 통찰했다고 밝혔다. 유형(有形)한 세계 속에 보편적 이치를 파악하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은 분명 초월적 영역의 체험이 중요한 종교적인 면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역은 십오 일언(十五 一言)과 십일 일언(十一 一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10은 무극(無極)으로 하늘을 상징하고, 5는 황극(皇極)으로 땅을 상징하며, 1은 태극(太極)으로 사람을 상징한다. 무극∙태극∙황극의 합일을 주장하는 정역의 기본원리는 인간과 천지 우주의 일치라는 이상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곧 모든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의 궁극적 완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역의 정신은 미래적이고 완성적이며 이상적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정역의 상수론적(象數論的) 논리는 천문∙역학∙역사의 변화도수를 해명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변화와 현상의 궁극적 중심으로써 황극(皇極), 중(中)의 강조이다. 여기에서 일부사상의 통일성∙조화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반면에 상제님께서는 정역의 수리적 공사를 보셨는데, 김 일부의 괘와 같지만 그 수리가  다르다. 상제님은 주역의 문왕괘도에 수리만 가일극(加一極, +1) 하였다.

 

  

 

 다음으로 상제님과 김 일부의 만남과 관계를『전경』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상제께서는 익산군 이리(裡里)를 다음날 김 일부(金一夫)를 만나셨도다. 그는 당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 날 일부가 꿈을 꾸었도다. 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일부에게 강 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오르라는 천존(天尊)의 명하심을 전달하는도다. 그는 사자를 따라 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가니라.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 요운전(曜雲殿)에 그들을 안내하고 천존을 배알하게 하는도다. 천존이 상제께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고 극진히 우대하는도다. 일부는 이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돌연히 상제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도다. 일부는 상제께 요운(曜雲)이란 호를 드리고 공경하였도다.”(행록 2장 2절)

  ‘익산군 이리(裡里)’는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를 말한다. 그리고 위의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전경』의 또 다른 곳에도 나타난다.  

“상제께서 광구천하 하심은 김 일부의 끔에 나타났으니 그는 상제와 함께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에서 원신(元神)이 상제와 함께 광구천하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알고 상제를 공경하여야 함을 깨달았도다.”(예시 3절 참조) 

  김 일부는 상제께서 광구천하를 위해 인간 세상에 오신 주재자이자 절대자임을 깨닫게 된다. 상제께서는 김 일부를 청국명부로 임명하시고 중국의 해원공사를 단행하시게 된다.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 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리워서 상제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으셨도다. 덕겸은 이렛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 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공사 제3장 18절)

 

오늘날 중국은 상제님과 종도 덕겸의 판단으로 공사가 처결되어 선천 인류역사상 가장 상극으로 국토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한이 맺힌 것을 상제님 공사로 13억 인구의 영토로  통일되게 되었고, 상제께서는 후천정역을 부르짖었던 김 일부를 중국 신명계를 관장하는 명부로 정하셨다. 중국은 번영을 누리나 대(大)자는 우리나라에 오고 보은신들도 함께 들어왔다. 그래서 예로부터 중국이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조공을 받았으므로, 우리나라에 보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결국 상제께서 행하신 중국의 해원공사로 말미암아, 중국이 편안하면 우리나라는 더욱 부흥해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김 일부는 스승 연담의 당부에 서전과 주역의 연구에 정진하였고, 영가무도의 심신 수련을 쌓아 정력을 완성하여 후천이 다가올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여 원(冤)이 맺혔다.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상제님께서는 명부공사를 행하시어 청국명부(淸國冥府)에 김 일부를 임명하셨다. 김 일부는 한말(韓末)에 역사의 일대전환을 깊이 인식하였고 세계질서의 실현을 위한 논리와 이념을 독자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한국사상사와 종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