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움직인 만고명장  전 명숙(全明淑)

상놈과 천인을 귀히 여긴 마음으로 죽어서 조선명부로 임명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

 

이 노래는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는 그 시절 백성의 고통을 표현 한 것으로, 전명숙(전봉준)의 별호 '녹두장군'과 일맥상통한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탐관오리의 착취와 부패에 반발하여 일어나 그것이 발전되어 사회 개혁운동까지 번지게 하고,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인 만고명장 전명숙(공사 제1장 34절), 과연 그는 누구인가? 

전명숙은 1855년 12월 3일 전북(全北) 고창읍 죽림리 당촌에서 태어난 걸로 추정되고, 10대 전후에는 원평 근처의 황새마을(현 정읍 감곡면 계룡리)에서 살았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 1866년에 간행된『天安全氏世譜』에서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일대라 한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그의 어릴적 이름은 봉준(琫準), 항렬명은 영준(泳準)이며, 자(字)는 명숙(明叔)이다. 그의 부친은 전창혁(全彰赫)이고 모친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이다. 그는 샛별같이 빛나는 눈에 5척 신장의 작은 몸집이면서도 단단한 체구였기 때문에 ‘녹두장군’이라는 별호를 가졌다. 그는 유년 시절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등을 숙독∙섭렵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장성하면서 때때로 병서를 탐독하여 무술 ∙ 병법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무복(巫卜) 점술법(占術法)에 관하여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어릴때 부터 다양한 교양과 체험을 쌓았으므로 그의 시문(詩文)과 도학(道學)의 경지는 물론 정치적 경륜도 남달리 탁월한 바가 있었다. 뒷날 갑오혁명(1894년)때 저 유명한 창의문(倡義文)과 포고문(布告文) 그리고 집강소(執綱所)의 개혁안 등을 기초하여 근대화할 정치적 경륜을 뚜렷하게 한 바 있다. 

전명숙은 1890년 35세를 전후하여 동학에 입교하였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밝혔듯이,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동학이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서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명숙이 난을 일으켰을 때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밖으로는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아편전쟁(1839~1842)과 태평천국의 난(1851~64)으로 인한 우리 조선의 충격, 초기 자본주의의 시장개척과 원료공급을 위하여 동방으로 눈길을 돌린 서양세력으로부터 자신이 순수성을 지키려는 소박한 조선의 민족의식,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붕괴되어 가는 봉건체제의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혼란을 비롯, 전반적인 모순과 종교∙ 사회적으로는 유∙불∙선사상이 피폐되어 갔던 때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봉준으로 하여금 일어서게끔 만든 결정적인 사람은 조병갑(趙秉甲)이였다. 그는 고부(古阜)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다른 벼슬아치보다 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인물이었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세금을 감면해 주지 않고 오히려 국세로 3배나 높여 징수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곳 곡창지대인 고부에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만석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새로운 보(洑)를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노임 없이 강제로 동원하여 쌓았는가 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속여 묵은 땅을 개간하게 한 다음 추수를 하자 약속을 어기고 징세를 했으며, 군내의 부호들에게 갖은 트집을 잡아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태인 군수를 지낸 부친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긁어 모았다. 

한편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의 부친의 죽음이였다. 부친은 마을에서 오늘날 이장(里長)에 해당되는 분이였는데,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착취행위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전명숙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부친의 영향이 결정적이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명숙을 대표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쫒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하고, 이듬해인 1894년 1월 10일 이평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을 공표하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蜂起)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고부민란입니다. 고부에 도착한 전명숙 부대는 우선 군청을 습격한 다음 조병갑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하였다. 농민들은 옥(獄)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풀어주고 다음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갖추었다. 고부는 전명숙 부대가 완전 장악하였으나 들어갔지만 파면당한 조병갑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원명은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므로 전명숙도 더 이상 사태를 확대, 악화시키지 않기로 하여 일단 농민군을 해산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주력부대만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케 하였다. 

이제 고부가 평온을 되찾는가 했는데 그 다음 달인 1894년 2월 장흥(長興)부사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어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용태는 신임군수 박원명에게 고부민란의 주모자를 찾아내라고 위협하는 한편, 역졸들을 풀어 마을마다 뒤지고 다니며 마구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가 하면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집을 불태우고 본인이 없으면 처자까지 붙잡아서 살육을 자행했다. 고부는 또다시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고 전명숙은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그는 호남각지에 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보내 부안 백산으로 모이게 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 ∙ 최대의 민중항쟁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격분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백산에 1만 명이 넘게 집결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솟아 있는 야산 백산의 봉우리에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깃발이 펄럭이고 흰옷을 입은 농민군이 대오를 짜 진지를 구축했다. 그래서 흰옷을 입은 농민들이 서 있으면 온산이 하얗게 보이고, 앉아 있으면 대나무 창이 온 산을 이룬다 하여‘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 김개남(金開男)을 총관령(總管領)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 국난을 당해 의병을 일으킴)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고창의 무장에서 기포[茂長起包ㆍ전북 고창군 무장지역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하였다. 무장기포는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창의문(倡義文) 발표를 계기로 봉기, 고창ㆍ부안ㆍ고부ㆍ태인 등으로 진군해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해발 35.5m의 야트막한 고개)에서 관군을 대파함으로써 전국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황토현 싸움의 승리와 그 여세를 몰아 4월 24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명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조선시대 때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임시로 보내던 관리)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청나라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靑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는 홍계훈이 제시한 정부의 조치와 방침에 응하기로 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 노비의 해방 ∙ 토지균분제 실시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폐단이 많은 정책을 개선하는 안건)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홍계훈으로부터 확약을 받고 양자사이에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집강소는 최초의 농민 자치정부였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민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실천해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전후(戰後)를 마무리 짓는 일이였다. 그는 폐허가 된 호남땅을 돌아오면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동학교도의 작폐가 심각했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사태의 흐름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는 교도들의 흥분을 제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통유문(通諭文)을 발표했다. 전후(戰後)의 일을 모두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향에 온지 몇일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와 대궐까지 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수시로 날아들어 그를 괴롭혔다. 9월 전후로 삼례(三禮)에 진출하여 봉기를 결정 삼례 집결통문을 발송하였다. 전명숙은 남부접주로, 손병희, 최시형은 북부접주로 병력을 지휘하였다. 제1차 진격목표는 공주(公州)였다. 동학군은 총사령관에 또다시 녹두장군 전명숙을 동도차의대장(東徒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공격하기 전날인 10월 21일 신식무기로 완전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이 먼저 공주성에 도착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 여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접전을 거쳐 11월초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대패하여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로 얼룩졌다고 한다. 나머지 농민군도 전북 금구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시운을 잃으니 영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일본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전봉준은 원평 태인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인 후 그는 수행 인 몇 명과 11월 29일 장성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돌아가 밤을 지냈고, 다음날 백양사로 이동하여 청류암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김개남이 은신하고 있는 태인 산내면 종성리로 가는 도중이었다. 해질 무렵에 회문산 아래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옛 부하인 김경천(金敬天)을 만났으나 재물에 눈이 먼 그의 배신으로 전명숙은 체포 되었다. 

한편 법원에서 법관은 전봉준의 죄상을 들먹였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도 있었다.

“양반과 부자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종문서를 불질러 바꾸지 못할 강상의 법을 무너뜨렸으며..... 이는 곧 대역무도의 법을 범한 것이라. 어찌 죄인이 아니라 이르나뇨?“ 이에 전봉준이 답변한 대목은 이러했다.“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울려 행악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간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면서 당당하게 답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외세와 결탁한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3.1운동 ,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움직이는 민족·민중항쟁의 방화점이 되었으며 독일의 농민전쟁,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함께 농민이 중심이 된 세계 3대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봉준이야 말로 동학의 평등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그가 실현코자 하는 조목 중에 썩은 선비와 양반을 매도하고 노비와 백정 같은 천민의 차별을 없애고 지체와 문벌에 따른 불평등을 고치려는 것들이 있었으며 나아가서 과부의 개가를 금지한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것도 있었다. 실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조의 고질과 봉건체제의 뼈대를 이룬 모순된 신분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이요, 동학이 내세운 평등사상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현시킨 쾌거였던 것이다.

옥중에서 남긴 전봉준이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때가 오면 천지도 힘을 합하지만(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하매 영웅도 어쩔 길이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한 정의뿐 아무 잘못이 없건만(愛民正義我無失)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아주랴!(爲國丹心誰有知)

 

 삼천리 강토에 북소리 크게 울려 민중을 잠 깨우려 했던 백의한사(白衣寒士) 전명숙, 봉건왕조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을 구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그는 끝끝내 신천지 새나라가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895년 3월 30일 41살의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전명숙은 보국안민을 이루려는 일심(一心)이 있었기 때문에 만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눈앞의 이익이나 편안함을 추구하였다면 한갓 촌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좋은 자리를 탐하거나 왕후장상의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거사(擧事)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교법 제1장 2절 참조) 대도(大道)를 실현시키려는 그에게 험난한 역경과 고난은 끊임이 없었으나 그때마다 실망하거나 굴복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전명숙이 사명기(司命旗)가 없어 포한(抱恨)하기에 해원공사를 통해 그 기를 세워서 그의 원한을 풀어 주셨다(공사 3장 2절 참조). 상제께서 전명숙을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이라 칭송하였고(공사 제1장 34절 참조), 더욱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상제께서는 그를 조선의 명부로 임명하셨다(교법 제1장 2절, 공사 제1장 7절 참조). 

여기서 우리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는 일이라면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좌절하거나 비굴하지 말고 운명에 맞서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인들도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 보다는 인간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찾아 역경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사군자(四君子)처럼, 굿굿하게 정진해 나갈 때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