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경석(車京石)

 

보천교(普天敎)를 창립한 차경석(1880년~1936년)의 이름은 윤홍(輪洪), 자는 경석(京石), 호는 월곡(月谷)이다. 차천자(車天子)라고도 불렸다. 그는 1880년(고종 17년, 庚辰) 음력 6월1일 전북 흥덕군 부안면 호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중필(重弼), 자는 치구(致久)이고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그의 부친은 전봉준과 함께 포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을 1894년(甲午) 2월에 쫓아버린 동학접주로서 활약했으나 후일에 흥덕에서 관군에게 잡히어 그 앞산에서 포살되었다. 이때 월곡의 나이가 불과 15세였는데, 그는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업어다가 대흥리에 묻었다 한다.

그는 장성하면서 부친의 뜻을 이어 동학운동에 참여하였고, 22세에 일진회에 가입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巡回官)을 지냈다. 일진회는 동학교도 송병준, 이용구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황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시정의 개선, 군정재정의 정리 등 4대강령을 내걸고 1904년 8월에 조직하여 국정개혁을 요구한 친일단체였다. 나중에는 이들이 이완용과 결탁하여 일제의 조선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들과 결별하고 천도교를 창시한 손병희를 쫓았으나 손병희와도 뜻이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찾던 중, 구천상제님을 뵙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1907년(丁未) 5월에 원평 부근 용암리 물방앗집 김사유(金士裕)의 집에 머무시다가, 그 앞 주막에서 차경석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전경』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읍(井邑) 사람 차경석(車京石)이 정미년 五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때 상제께서도 김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네시고 술을 드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지언정 어찌 살기를 띠리오」 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행록 3장 37절)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상제님과 종도들이 떠나는 것을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당도한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아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행록 3장 37절 참조)

그는 그 물방아집에서 열흘 동안 묵으면서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였으나 상제께서 응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를 능욕하시기도 하고 쫓아내기도 하셨다. 그래도 경석은 끝까지 떠나지 않자, 상제께서 “네가 나를 꼭 따르려거든 모든 일을 전폐하고 내가 하라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너의 집에 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6월 초하루에 다시 이곳으로 와라. 그러면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곧 바로 집으로 가서 가사를 대충 정리하고, 약속한 그 날짜에 용암리에 다시 돌아와 상제께 배알하였다. 그가 재차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청하자, 상제께서 불응하시다가 사흘 후에 허락하셨다.(행록 3장 38절 참조)

차경석은 마침내 상제님의 도문(道門)에 종사함으로써 집안에서나 인척간에도 반대하는 말이 많았으나, 수도에 전념하여 성·경·신(誠敬信)이 출중한 종도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상제께서는 어느 날 경석이 참여하였던 동학교도들의 원혼을 해원시키는 공사를 단행하셨다.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ㆍ광찬ㆍ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 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 공신ㆍ황 응종ㆍ신 경수 등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 주시고 또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十二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공사 2장 19절)

 

상제께서 화천(1909년 6월 24일)하신 이후, 1911년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시중을 들었던 수부(首婦) 고판례(高判禮)가 상제님의 탄강치성을 드리던 중 졸도하였는데, 그 뒤부터 고부인이 상제님의 평소 언동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자 상제님의 영(靈)이 감응되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과거 상제님을 따랐던 자들은 다시 고부인에게로 모여들었다. 고부인을 중심으로 하나의 집단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1914년 상제님을 교조로, 고부인을 교주로 하고 교명을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 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차 번창하게 됨에 따라, 고부인의 이종사촌동생이며 상제님의 추종자였던 차경석은 고부인을 감금하고, 일반신도들과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하여 차경석의 실권이 강화되자, 고부인은 김제시 백산면 조당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1919년 별도로 태을교라는 교명을 가지고 교단을 분리하였다.

그 당시 차경석과 고부인이 주도한 교단은 그 규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활동에 있어서도 많은 사회적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상제께서 화천하신 뒤에 청수를 올리고 태을주를 읽는 것으로 포교의 방법이 정해져서 치병과 개안(開眼) 등 상제의 놀라운 감화를 받아서 급속히 포교가 이루어졌다. 차경석은 자신의 교세가 늘어가게 되자 1919년 방주(方主)라는 전국적인 교구를 두었고, 그 뒤 5, 6개월 사이에 신자의 수효가 수 십 만에 이르자 각 방주 밑에 몇 단계에 걸친 하부조직을 두었다. 1920년에는 천지운도(天地運度)에 따라 자기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盟主)가 되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제도를 혁신하여 전국의 신도를 60방주로 나누어 묶고 이를 통솔하기 위하여 많은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 일본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을 뚫고 경상남도 석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 천제를 지내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고 선포하였다. 후일에 이 보화교라는 교명은 보천교(普天敎)로 개명이 되었다. 그 후 차경석은 자칭 천자(天子)로 군림하게 된다. 이때 보천교에는 간부만도 55만7700명이나 되었는데, 보천교가 한창일 때 몇 백만이라는 신도가 있었다는 것이 허언(虛言)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신자의 총 수효를 600만 명이라고 선전하였다.

1922년『보광(普光)』을 발행했고, 1925년에는 최남선이 경영하던『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 · 경영하는 등 교세를 널리 떨쳤다. 보천교 신자들은 교단에서 발급하는 인장과 교첩(敎帖)을 얻기 위하여 포교활동에 열중하면서 많은 헌금을 바치려고 노력하여, 항간에서는 보천교의 재산이 당시 우리나라 전국토의 10분의 1을 살 수 있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 보천교의 교세가 커지고 교주인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일제 식민지 당국이 자기들의 천황을 능가하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전국 각지의 보천교 신자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경상도에서는 보천교 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수천 명의 교인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1919년의 만세 사건으로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던 만큼 100만이나 되는 신도를 거느린 대집단을 무력으로 탄압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보천교에 대하여 강력한 탄압책을 구사하는 한편, 차경석을 회유하여 친일시키려는 노력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에게 제주도 신도들의 교무금을 압수당한 경험이 있던 차경석은 교단 재산과 교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1924년부터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는 등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보천교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신도들을 구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총독부는 이를 묵인하는 태도로 나갔다. 또한 1929년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본부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립한 중앙교당 십일전(十一殿)의 준공식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것이 차경석의 천자 등극식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관청에서는 소요 가능성을 내세워 끝내 불허함으로써 차경석의 천자등극은 무위로 끝나고 교단 분열의 발단을 만들었다.

결국 총독부의 정책은 보천교를 회유하여 친일로 돌아서게 한 다음,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그곳의 대들보는 만주 노령 지방의 재목으로 완성되었고 총공사비가 50만원이 넘었다. 1만 여 평(33만㎡)의 부지에 건평 350평(1155㎡), 높이 99척(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달하여, 패망한 조선왕조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화려했다. 십일전(十一殿)에서 십일(十一)은 흙 토(土)자를 나타내기 때문에, 십일전(十一殿)은 토전(土殿)이 되는 것이다. 곧 이것은 ‘이 땅의 주인이 정사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의미로서 보천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경석은 그 건물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제는 건축 당시부터 시비를 일으켜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된 후에도 건물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교단의 재산만 쏟아 붓고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제가 의도한 함정에 빠진 셈이다. 이렇게 일제의 이간책으로 말미암아 교단에서 추진한 여러 사업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교단의 핵심 인원들이 혁신회를 발족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일각에서는 차경석을 암살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차경석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상제님의 가르침이나 권위를 무시하게 되자, 보천교에서는 교리를 둘러 싼 심한 갈등과 대립으로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게 된다. 따라서 보천교의 간부를 비롯한 일부 신자들은 보천교를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태을교(太乙敎) · 동화교(東華敎) · 서울 대법사(大法社) · 삼성교(三聖敎) · 천인교(天人敎) · 수산교(水山敎) · 홍로교(烘爐敎) · 보화교 · 선도교 · 무을교(戊乙敎) · 임무교(壬戊敎) · 인천교(人天敎) 등은 보천교에서 분파된 교단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교단들이 생기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의 한창 때에는 상제님을 신앙하는 교파가 100여 개에 달했으나, 보천교에서 차경석의 천자등극의 실패와 그에 따른 분열, 그리고 1938년 조선총독부가 선포한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점차 위축되거나 해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총독부의 강경한 정책과 탄압으로 각 교파의 많은 신도들이 투옥되거나 옥사하였다. 광복이 되자, 침체상태에 있던 각 교파들은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써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결국 1936년 3월 10일, 57세를 일기로 차경석은 세상을 떠났다. 몰려든 인파를 물리치고 일본 경찰은 그의 시신을 빼앗다시피 하여 인근 산에 묻고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해방 이후에야 겨우 봉인을 깨고 그 곁에 묘소를 만들 수 있었다. 일제는 교단을 강제 해산하고 재산을 공매 처분하였다. 십일전은 해체돼 재목의 일부는 당시돈 500원에 팔려 지금의 조계사 건물과 내장사 대웅전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나머지는 땔감으로 팔려갔다. 건물은 3분의 1로 줄어든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 지상천국의 나라 시국(時國)도 사라지고 보천교(普天敎)도 사라졌다. 지금 보천교 본당에는 1년에 네 차례 제사가 있을 뿐이다. 멀리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겨우 맥을 지켜가는 15명 남짓한 간부 신자만이 참석한다. 

차경석은 결국 상제께서 십이제국과 왕후장상의 꿈을 경계하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자를 도모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죽어서까지도 능욕을 면치 못하였다. 상제께서는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교운 1장 51절)고 천명하셨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이 천명은 곧 수도인들의 허영과 야망심을 경계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하셨다.(『대순지침』, 42쪽 참조) 수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에 순응해야 하는데, 이러한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되는 것이다.(『대순지침』, 53쪽)

우리의 도(道)는 신도(神道)다. 신(神)은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일을 속속들이 모두 알고 있다. 자신이 사심(私心)을 갖고 행한 일을 사람들은 모를 수 있어도 신은 속일 수 없다. 예로부터 과오를 경계하기 위하여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自欺自棄)이요,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을 속임이다(心欺神棄)”고 하였다. 신을 속이는 것은 곧 하늘을 속이는 것으로, 신은 이를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대순지침』, 42쪽 참조) 차경석과 같이 자신이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과 같이 군림하기 위해 천자(天子)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신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수도인이라면 사심(私心)을 버리고 하늘이 내린 품성인 양심(良心)을 갖고 행해야 한다.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이 있다.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고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해 발동하는 욕심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되기 때문에,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天性)을 되찾기에 전념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罪惡)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기 때문에 인성의 본질인 정직(正直)과 진실(眞實)한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어떤 죄악(罪惡)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차경석이 수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종단의 분규와 내분을 보면서 수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도전님께서 화천(化天)하신 이후, 우리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각자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도전님을 외치지만, 과연 도전님의 뜻에 따라 수도를 올바로 해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각자가 도전님께서 계실 때와 화천하신 이후  마음이 같고 또 그렇게 행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면 명백할 것이다. 상제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은 도문소자로서 입도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화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금싸라기 같은 도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선각과 후각이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신뢰는 저절로 쌓일 것이다. 자신은 실천하지 않고 수반들에게만 강요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도리어 배신당하는 처사가 된다.(『대순지침』, 47쪽 참조) 각자가 맡은 임무에 충실히 복무하고 윗사람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을 때는 아랫사람은 지체 없이 수행하는 것이 바른 처사가 된다. 선각과 후각이 각자의 위치에서 솔선수범할 수 있다면 이보다 신뢰와 결속을 다지는데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수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하극상은 배사률에 걸리고 상기하(上棄下)는 자멸을 가져 오리니, 모두들 제자리를 제가 지켜서 질서를 유지하기에 힘을 모으기를 바란다.”(『대순지침』, 71쪽)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여 되새겨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