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조빙호(玉藻氷壺)

      

  옥조빙호(玉藻氷壺)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동 계곡의 화양구곡중 제5곡인 첨성대 아래 암벽의 석함속에서 나타난 글이라 전해진다. 화양구곡은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이름을 지은데서 유래 한다.

위 사진은 9곡 중 제5곡인 첨성대 아래의 암벽이다. 사진에 나타나 있듯이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의 음각으로 새겨진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사각 형태의 홈이 파여 있는데 이것이 석함이다. 그 아래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의 글이 음각 되어 있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송시열의 글씨이고, 비례부동(非禮不動)은 숙종 때 판서 민정중이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친필을 구해와 송시열이 새겼다고 한다.

 

이 ‘옥조빙호(玉藻氷壺)’는 바로 사각홈인 석함에서 나왔다. 즉 석함 속에 ‘옥조빙호 만력어필(玉藻氷壺 萬曆御筆)’의 글이 새겨진 판이 끼워져 있었고 석문(石門)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석문이 깨여지면서 글의 판이 나온 것이다.

좌측의 사진은 옥조빙호를 새긴 그 석판이 나타나고 사라지기 전, 유학자이자 교육자인 우인규(禹仁圭, 1896~1967)라는 사람이 탁본한 것인데, 그 탁본사진은 2012년 김근수(괴산향토사연구회장)씨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탁본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 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가 새겨진 석판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이 홈 속에 끼워져 있었던 판에는 탁본의 사진과 같이 ‘萬曆御筆(만력어필)’의 소문자와 ‘玉藻氷壺(옥조빙호)’의 대문자로 이루어진 8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글의 내용은 ‘옥조빙호’의 글이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신종)가 쓴 옥조빙호라는 의미이고, 송시열이 석문을 만들고 그 속에 무엇을 어찌 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구전(口傳)되는 말에 의하면 석문이 열리면 천지는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한다고 한다. 지금은 암벽에 ‘옥조빙호’의 글은 볼 수 없고 석함의 흔적만 남아 있다.

 

옥조빙호의 뜻을 살펴보자. 그 어원은 옥조에서 옥(玉)은 면류관 앞뒤의 유(旒)에 늘어뜨린 옥이며, 조(藻)는 색실을 꼬아서 옥을 꿰는 데 쓰는 끈을 말하는바, 옥조는 임금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 할 수 있고, 빙호는 본래 얼음을 담는 옥 항아리이니 임금의 마음이 차고 맑아야 한다는 의미라 하겠다. 즉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순결한 일심의 마음을 뜻한다. 이는 임금이나 군자가 지켜야 할 마음으로 여겨진다.

이는 『서전서문』의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 인심(人心)에 치우치지 않고, 늘 도심(道心)을 밝혀 한결같은 일심(一心)으로 일에 처해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누구에게나 알맞게 일상적이며 한결같이 도리에 맞게 한다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성인이 전한 심법(心法)의 마음자리와 같은 뜻으로 여겨지고,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에게 선정의 방안을 물었을 때, 기자가 교시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핵심내용인 구주 중 오주(五疇)의 황극(皇極)이 ‘임금을 세운다’는 ‘황(皇)’과 ‘지극히 바른 표준(標準)을 세운다’는 ‘극(極)’의 합한 단어로 그 의미가 ‘건중건극(建中建極)’과 같이 지극한 왕도(王道)를 나타내고 있는 바, 그 황극이 구주의 중심인 오주에 자리 잡고 있듯, 송시열이 화양구곡 중 오곡(五曲)에 옥조빙호의 글을 비장한 의의를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경』에 “갑오년(1954년) 삼월에 도주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교운 제2장 50절) 에서와 같이 그 석함의 석문은 도주님께서 만동묘 유지를 두루 살피시고 돌아오신 밤중에 뇌성벽력과 함께 깨어지고 ‘옥조빙호와 만력어필’이 새겨진 석판이 드러난 것이다.

 

이 황극신 공사는 『전경』에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황극신은 청국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하시며「황극신이 이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 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 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하사 친이 음조를 부르시며「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다.」하시고「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 하였다.”(공사 제3장 22절)와 같이 무신(1908)년 겨울에 구천상제님께서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하려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광서제(淸國光緖帝, 1871~1908)에게 응기된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하시며 대신문을 여시고 공사를 행하셨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광서제가 붕어하게 되는데, 그 날이 1908년 11월 14일 이다.

 

또한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황극신은 신명세계에서는 황극의 자리에 응기한 신명으로 정사(政事)와 깊은 관련이 있고, 황극신이 떠나면 정사가 어지러워져서 문란해진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황극신을 옮기시는 공사는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고 후천의 정사(政事)를 여는데 아주 중요한 공사로 생각되어진다. 또한 작게는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는 상제님의 말씀과 같이 조선국이 대중화(大中華)를 통해 상등국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공사이고, 나아가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를 통한 세계평화의 확립을 이룰 수 있는 근간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러한 과정이 이 땅에 상제님께서 임어 한 곳이라 당연한 것으로도 이해된다.

상제님의 공사인 황극신과 대신문에 대한 도주님의 어떤 도수를 보신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고, 그 결과 석문이 열리고 옥조빙호의 글이 나타난 것은 도수 보심에 대한 표증이기도 하고(교운 제2장 50절 참조), 구전 되어온 이야기 같이 도주님께서 후천진인(後天眞人) 이심의 또 다른 증표로도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이 도수는 이후에 전개되는 부산도장의 감천으로의 이궁과 감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부와 이후 전개되는 종단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상에서 옥조빙호의 뜻과 그 배경, 그리고 황극신 공사에 대하여 미흡 하지만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도성덕립을 이루려는 우리는 옥조빙호의 뜻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속임과 거짓 없는 맑고 깨끗한 순수한 일심으로 각자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어야 하겠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