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우 도(尋牛圖)                                          

 

 인존세상을 열어갈 대순 수도자가 길잡이로 삼아야 할 수도정진의 핵심이 취지문에 담겨있다. “성경신 삼법언으로 수도의 요체를 삼고 안심, 안신 이율령으로 수행의 훈전을 삼아 삼강오륜을 근본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국법을 준수하여 사회도덕을 준행하고 무자기를 근본으로 하여 인간 본래의 청정한 본질로 환원토록 수심연성하고 세기연질하여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면이수지하고 성지우성” 하여야 한다.

 이러한 취지문을 누구나 알기 쉽고 수도의 표본으로 삼아 나갈 수 있도록 제시된 그림이 심우도이다. 심우도는 소 찾는 그림으로 소는 축(丑)이요, 축월은 12월이고 도(道)이므로 상제님을 찾아 모시고 정법 수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상징물이다. 소를 설문(說文)에서는 일이요 이치라 하고 예기 곡례하(禮記曲禮下)에는 일원대무(一元大武, 원은 머리, 무는 발자취)라 한다. 그러기에 심우도는 수도인마다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되고 질문과 답을 구할 수 있는 만세공통의 진리의 설화(說話)요 수도의 나침판이다.

  옛적에 성인들은 보이지 않는 사물을 알려줄 때 묘사화법을 사용하였듯이 도장의 심우도 역시 수도인 누구나가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심우도는 대순진리의 비전이자 목표요 상징과 은유의 이미지를 담고 있고, 득도(得道)와 성도(成道)의 과정을 함축한 미화대의(微畵大義)로 그려져 있다.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달아 가고 상제님을 찾아가는 수행의 노정(路程)을 제시하여  무명속을 헤매는 미련한 중생이 없도록 하기 위한 상제님의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 찾는 진리를 나타내는 심우도의 주인공은 동자와 소로 비유되고 불가에서는 동자는 중생으로, 소는 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 도에서는 동자는 도문소자이고 소는 도전님이시다.

 도주께서 내려주신 호가 우당(牛堂)으로 소는 도전님을 상징하는 은유로 설시(說示)되어 포천수도장 영대 1층에 삼면벽화(內壁, 三面壁畵)로 모셔져 있다. 각 도장마다 모두 6폭의 심우도가 외벽에 그려져 있으나, 오직 이곳에서만 9폭으로 모셔진 심우도는 내부벽화이면서 탱화의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한 취지문의 내용을 담은 변상도(變相圖·經變,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의 성격도 담고 있는 진리화(眞理畵)이다. 따라서 심우도는 수도과정을 응축한 상징적 그림이기도 하지만 도통완성으로 향하는 5만년 선경세상의 지름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심우도는 일반적 설명과 보편적 인식만으로는 그 내면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수도를 통해서 누구나 그 심오한 이치를 깨달아 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 법당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불가의 심우도는 송나라 때 곽암(廓庵)이라는 승려가 처음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견성성불의 과정을 그려놓은 선화(禪畵)이다. 또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불성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목동이 소 찾는 것에 비유하여 열 개의 그림과 게송으로 설명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로도 불린다. 대체로 불도인이 입문하여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심우도가 선 수행의 핵심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 대순의 심우도는 도전님을 상징화한 성화(聖畵)로서 천성품을 찾아가는 과정을 흰 소에 비유하여 설하고 있다. 또한 불교에서는 외부에서 내부로 나(我)를 찾는 선방(禪房)이지만 대순은 외부(道)에서 내부의 나(我)가 타인(他人) 즉 남을 잘되게 함으로써 선방(仙房)에서 선(仙)을 만나 선(仙)이 됨을 이름이다

 이 세상에 오직 유일무이한 9폭 심우도의 구성은 심심유오, 봉득신교(2폭), 면이수지(2폭), 성지우성(2폭), 도통진경의 순차적 과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다른 곳에 모셔진 심우도와 다른 점은 6번 성화에서 소는 없고 동자 홀로 소고삐를 오른손에 쥐고 있는 장면과, 9폭 심우도상을 1만 2천 도통군자로 창성하는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의 혈맥인 영대(靈臺)에 모셨다는 점이다.

  

 심우도의 1번 성화는 심심유오(深深有悟)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오직 무엇을 바라는가? 큰 파도가 이는 바다(宦海)에 던져진 나는 누구인가, 나의 근본은 무엇일까에 대한 진리의 화두(話頭)를 들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발심대원(發心大願)하는 산동(山童)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동자는 천명이 밝힌 진리를 발원하는 삶을 찾는 고민을 담고 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명예와 영화, 생과 사는 무엇이며, 번뇌와 망상은 왜 생기는가 등에 대한 고뇌일 것이다. 

 이 대목은 누구나 읽었던 서양동화에 나오는 ‘잃어버린 반쪽 나’를 찾는 그런 일상의 길이 아닌, 이 세상의 어두운 업굴(業窟)에서 벗어나 심령을 찾아 가는 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선령들의 무한한 공력에 의해 어렵게 태어났기에 꿈같은 한 세상을 잠시인들 헛되게 보낼 수 없음(교법 제2장 제36절)은 자명(自明)한 이치이다. 이와 같음을 볼 때 이 세상에 나있는 수천만 갈래의 길 중 도의 길을 찾아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직 수천 만생의 인연공덕으로 찾아지는 길이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고나 할까.

 인연 따라 생기는 모든 일은 꿈같고 물방울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다고 했다. 소설 구운몽의 한 구절이다. 그러기에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반드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人生有幾回轉 此時不搏何時搏). 바로 지금이다. 따라서 신명을 찾는 길이 도를 구하는 길이기에 무릇 뜻있고 연운(緣運)있는 동자가 도를 찾아 대순에 귀의하게 됨을 표상함이다.

 

 다음, 2번 3번 성화는 봉득신교(奉得神敎)이다. 

 상제님을 찾아 인간이 걸어가야 할 진리와 자유의 길을 도라고 할 때 동자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밝혀진 소발자국(발자취)을 발견하고 ‘여기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다. 

 소발자국을 따라감은 상제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정진하는 길이다. 그러기에 인간완성을 향한 진리의 길은 삼생의 인연이 있어야 쫒을 수 있다(교법 제1장 제4절)고 했다. 이제 선천에서의 도수를 마무리하고 후천선경으로의 교차기에 진리의 법방(法方)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증유(未曾有)의 길이기에 가는 길이 험하고 고단해도 오로지 홀로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지혜의 문턱을 향해 한 굽이씩 나아간다. 

 주변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서방정토에서 비추는 빛줄기가 동자를 안내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는 진정한 수도자의 지혜와 이를 실천할 용기가 필요하다. 

 높이 보고 멀리 생각하는 것을 지혜라 한다(高見遠慮曰智). 그래서 크게 지혜로운 자는 천지와 함께하므로 춘하추동의 기운이 있고 그 다음으로 지혜로운 자는 일월과 함께하므로 현망회삭의 이치가 있고, 또 그다음으로 지혜로운 자는 귀와 신명과 함께하므로 길흉화복의 도가 있다(大智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其次與日月同有 弦望晦朔之理 又其次與鬼神同 有吉凶禍福之道·제생 제43절)고 했다. 그래서 이 길은 희망과 꿈을 모아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아울러 용기도 필요하다.

 

 다음, 4번 5번 성화는 면이수지(勉而修之)이다. 

 소의 발자국을 쫒아 발걸음을 재촉한 동자가 산허리를 돌아가는 소의 뒷모습을 간신히 찾았다(見性)고 안도하는 순간, 천지가 진동하고 뇌성벽력이 일고 비바람 몰아쳐 칠흑 같은 어둠에 앞길마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리의 길을 체득한 동자는 더욱 분발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이겨냈을 때만이 흰 소에 다가가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소의 성품을 알고 만나게 되는 공(空, 무한가능성)의 단계로 세세생생 쌓여온 습기(습관적인 기운)의 독을 제거함으로써 경지가 바뀌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수도인 각자가 닦아온 본바탕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체계와 체질에 따라 일심의 경지를 집약시켜 나가야 하는 실천궁행의 단계이다. 즉 각자 지니고 있는 습인(習因)의 무명(無明)과 업장(業障)을 벗어 버리고 수많은 마장(魔障)과 시련을 받아 넘겨야 하는 시기이다. 

 우리의 일은 복(福)보다 화(禍)를 먼저 겪는다고 했다. 굳게 먹은 마음도 심지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하는 가장 고난위도의 진법(眞法, 陳法)수도의 단계이다. 이 길에서 낙오되지 않고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최고의 성경신으로 일심수도에 진력해야한다.

 상제께서도 맹자의 한 절(告子 章句下15장)을 일러주셨다. “하늘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기전에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하고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하고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등 고난과 시련을 주어서 마음을 분발하고 인내케 하여 그가 잘하지 못하는 능력을 더 많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贐行 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행록 제3장 제50절).” 이는 모든 병고위난(病苦危難)으로 삶의 곡절을 겪게 하여 더욱 지혜롭게 하고, 일체의 기를 조절하여 지성합일 시키고자 함이다. 고행을 의미하는 산 넘어 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수도과정에서 오는 고난의 유익함을 되새기게 하는 좋은 경구이다. 

 보왕삼매론에도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옛 성인이 말씀하시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다. 까치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진다. 그러므로 새들도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듯이 우리 수도인도 혹독한 고통을 이겨내는 튼튼한 마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다음, 6번 7번 성화는 성지우성(誠之又誠)이다. 

 흰 소를 찾아가는 성지우성은 6번 성화에서는 고삐만을 잡고 있다.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세계요 현금(絃琴)의 세계이다. 

 다른 곳의 심우도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 성화는 그동안 많은 교화가 있었던 만큼 도전님께서 깨우쳐 주시고자 했던 함의(含意)가 무엇인지 수도인 각자 잘 새겨볼 일이다. 이어지는 7번 성화는 재세시의 누런 소(黃牛, 중앙 5,10 土)가 흰 소(白牛, 서방 4,9 金)로 바뀐 모습으로 신명계의 원위자리에 모심을 뜻한다.

 이제부터 동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심의 끝자락을 어떻게 잘 유지해 나갈 것인가에서 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목적지에 잘 도달할 수 있는가가 초미(焦眉)의 관심사다.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 했다. 상제님께서도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으면 한 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던지 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 할 것이로다(교법 제2장 제5절)고 하셨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과 같이 사회에서도 어떤 분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을 투자하라고 한다. 다름 아닌 1만 시간의 법칙이다.

 하물며 상제님의 진리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한한 공력을 들여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야말로 정성에 정성을 들여 매진할 때만이 7번 성화에서 소를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소와 동자사이에 막힘이 없는 여상(如常·如如)의 경지로 상제님의 진리를 지극히 공경함으로써 자유자재하는 도덕군자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다음, 8번 성화는 도통진경(道通眞境)이다. 

 동자가 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후천인도의 참경지로 나아가는 상통천문, 하달지리, 중찰인의의 단계이다. 즉 소와 동자가 하나가 되는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한 진정한 깨달음의 단계이다.

 따라서 근원으로 돌아와 불생불멸의 인과를 확연히 깨친 단계로 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지만 물에 걸리지 않고 새가 하늘을 날지만 허공에 걸리지 않는다(漁游水中 無礙於水 鳥飛虛天 無礙於空)는 말과 같다. 즉 도즉아 아즉도(道卽我 我卽道)의 경지를 정각하고 활연관통하여 삼계를 투명하고 삼라만상의 곡진이해에 무소불능 하는 영통의 단계, 도통의 단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심학(心學)과 심법(心法)이 일체(一切)를 이루는 단계이다. 

 각자 닦은 바에 따라 천지신명이 응감하여 신인조화가 되는 경지이다.

 

 다음, 9번 성화는 도지통명(道之通明)이다. 

 심우도에 있어 최종목적지로 도가 밝아진 후천세상을 펼쳐 보인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조화되어 정신계와 물질계가 통합된 천지인 삼계가 도통된 지상신선세계 천지선경세상이다. 즉 옛 성인이 말한 극락이요, 도화낙원이며 불로불사의 선경세상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모두가 신선선녀 된 모습이다. 이러한 좋은 세상을 상제께서는 예시 81절에서 밝히고 있다.

 후천에는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 세계를 통달하고 수·화·풍(水火風)의 삼재가 없어져서 상서(祥瑞)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 하셨다. 모든 것이 조화로서 치화하는 시대, 모든 도문소자가 소원하는 후천 5만년 청화세계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도전님께서 그려놓으신 심우도는 수도인에 마음의 횃불이 됨이 분명하다. 아울러 수도인의 자기완성 관점에서 보면 심우도는 공자가 제시한 인격형성 6단계와도 일맥상통한다. 공자가 읊은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서고, 마흔 살에 흔들리지 않고, 쉰 살에 하늘의 이치를 알고, 예순 살에 귀에 거슬림이 없어지고, 일흔 살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했다. 이를 자기성찰에서 보면 세상 인류에 보편적 가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에 수도의 중심은 항상 상제님의 법과 진리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선천에서의 사회적 잣대, 문명의 이기로부터 자신의 습기(習氣·習慣)를 버리고 진일보해야만 소(牛)등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무상의 진리요 법이다. 화엄경에도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정의의 원칙에서 보더라도 이론이성은 진리를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실천이성은 수도인으로서 나를 찾아 행하는 법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포천수도장에 모셔진 9폭 심우도는 도전님께서 화천하시고 훗날 전호덕 원장께서 도장을 살피시다 영대 1층이 자물쇠로 잠겨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열어 봄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원장께서는 어떤 뜻이 계실까 고심을 하시다 도전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은 이것을 ‘잘 간직해 나가라는 분부’ 아니시겠는가 하고 도문에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거듭 말하거니와 심우도에 모셔진 소는 도전님을 뜻한다. 그렇기에 상제님 가문의 도문소자는 진심으로 경건한 뜻을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심우(心牛)요, 우주요, 불로불사의 길이다.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내일의 나를 담금질하는 교훈의 심우도. 이 짧은 이야기를 끝내면서 일언(一言)한다면, 

 첫째, 마음에 모신 심우도를 잊지 마라. 

 둘째, 첫 번째를 절대로 잊지 마라. 

 이것이 도문소자의 맥줄이다.

 

『대순회보』포천수도장, 제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