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록4장11절
상제께서 전주 김 준찬(金俊贊)의 집에 가셔서 김 덕찬(金德贊)ㆍ김 준찬(金俊贊)ㆍ김 낙범(金落範)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
행록4장12절
덕찬은 백지 한 장에 칠성경을 쓰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에 그 글과 모양의 크고 작음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의 뜻대로 쓰라」 하시므로 덕찬이 양지 한 장에 칠성경을 가득 차게 쓰고 나니 끝에 가서 석 자 쓸 만한 곳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그 여백에 칠성경(七星經)이라고 석 자를 쓰신 후 불사르셨도다.
행록4장13절
상제께서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에 이르시니라. 도중에서 상제와 그는 한 장군이 갑주 차림에 칼을 짚고 제비산 중턱에 서 있는 것을 보았도다. 상제께서 구릿골에 이르셔서 김 준상(金俊相)의 집에 머무시니라. 어떤 사람이 김 준상을 잡으려고 이 밤에 구릿골에 온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전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태연히 계시다가 저녁 무렵에 형렬의 집으로 가시니라. 여러 종도들이 준상의 집에서 잠자는데 공우는 뒷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던 터에 원평(院坪) 쪽으로부터 등불을 가진 사람 대여섯이 구릿골을 향하여 오다가 선문(旋門)에 이르렀을 때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되돌아가 종도들을 깨워서 함께 피신하려고 하나 곤히 잠든 사람들이 좀처럼 깨지 않았도다. 그러나 한 식경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그는 잠에 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그에게 「대장은 도적을 잘 지켜야 하나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4장14절
상제께서 공우에게 가라사대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나의 말을 믿을지어다. 너는 광인이 되지 못하였으니 농판으로 행세함이 가하니라」 하시니라.
행록4장15절
四월에 들어 심한 가뭄으로 보리가 타니 농민들의 근심이 극심하여지는도다. 종도들도 굶을 걱정을 서로 나누니 상제께서 「전일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는 일은 농담 한 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퍼지니 이후부터 범사에 실없이 말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전주 용머리 고개 김 낙범에게 들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보고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고 하시면서 다 잡수셨도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큰 비가 내리니 말라죽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도다.
행록4장16절
상제께서 四월 어느 날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을 받고 계셨는데 전에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돈 열 냥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시자 그는 무례하게 상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 열 냥을 빼앗아 갔도다. 이 방약무인을 탄식하시고 상제께서 그를 한탄하셨도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다시 전주에서 서신으로 돈을 청하여 오니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돈 열 냥을 구하여 보내시니라. 며칠 지낸 뒤에 정 순검이 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맞아 죽으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오」 하시고 다시 한탄하셨도다.
행록4장17절
무신년 四월 어느 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 하셨도다.
행록4장18절
상제께서 전주 불가지(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에 가 계실 때의 어느 날 김 덕찬을 불러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들었도다.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이제 용소리 김 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는 명을 좇아 용소리로 떠나느니라. 그가 김 의관의 집 근처에서 취한으로부터 심한 곤욕을 당하고 불가지로 돌아오니라. 상제께서 문 바깥에 나와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물으시니라. 덕찬이 공연히 보내어 봉변만 당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도다. 상제께서 덕찬과 함께 방안에 들어오셔서 술을 권하며 가라사대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 하시니 그는 상제를 두려워하니라. 그 후부터 덕찬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언행을 삼갔도다. 상제께서 두 달 동안 용소리 시목정(龍巢里柿木亭)에 계시면서 이곳저곳의 종도들의 집에 다니셨도다.
행록4장19절
손 병욱(孫秉旭)은 고부 사람인데 상제를 지성껏 모셨으나 그의 아내는 상제의 왕래를 불쾌히 여기고 남편의 믿음을 방해하였도다. 어느 날 병욱의 아내가 골절이 쑤시고 입맛을 잃어 식음을 전폐하여 사경에 헤매게 되었느니라. 공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제께 아뢰면 고쳐 주시리라고 믿었도다.
행록4장20절
그 후 어느 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와룡리(臥龍里) 네거리에 이르렀도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회룡리(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신 경수(申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황 응종(黃應鍾)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저희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 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 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 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 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 이르시니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 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